병원은 비용절감, 의사는 의료기술개발 활용, 환자는 편리

최근 한 외과병원을 찾은 A씨는 병원이 크게 바뀐 것을 실감했다. 의사는 종이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에 진료결과를 기록했고, 이 기록들은 원내 전송망을 타고 방사선실과 물리치료실에 전송돼 A씨는 이런저런 의뢰서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또 X레이 사진은 컴퓨터에 저장, 진찰실로 전송돼 X레이 필름도 없어졌다. 다음날 재진을 받을 때도 의사는 종이차트가 아니라 모니터를 통해 A씨의 진료기록과 X레이 사진을 살펴본 후 처방을 내렸다. 최근 구축된 처방전달시스템(OCS)과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에 의해 병원의 진료시스템이 ‘확’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전자의무기록(EMR)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보적인 시스템에 불과하다.집에서도 진료받을 수 있어EMR는 1970년대에 시작된 의료정보화의 4세대에 속한다. 1세대는 70~80년대의 병원정보시스템(HIS)이다. 이 시스템은 병원의 경영정보를 데이터화해 병원 경영 합리화에 이용됐다. 2세대는 9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진행되고 있는 처방전달시스템이다. 의사가 내린 처방지를 원내의 통신망을 통해 해당 부서로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방사선실이나 물리치료실 등에 의사의 처방지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3세대는 90년대 후반부터 도입되고 있는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이다. X레이 사진,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 초음파 사진 등을 디지털데이터로 저장하고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필름을 들고 다니거나 따로 보관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영상자료를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볼 수 있게 됐다.EMR는 병원정보화의 4세대로 통한다. 지금까지 도입된 시스템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의료정보화의 수준을 한층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EMR는 의사의 처방기록, 환자의 병력, X레이 사진 같은 영상자료 등 환자에 대한 모든 기록을 디지털화하는 것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병원, 의사, 환자 모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편의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병원 입장에서 보면 병원의 유지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고 첨단병원이라는 이미지를 환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최초 시스템 구축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차트, 필름 등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과 인력을 줄일 수 있고 필름 같은 소모품 비용부담을 덜 수 있어 단시간에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시스템 사양이 워낙 다양해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800병상 규모의 병원이 EMR를 구축하면 연간 최소 20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의사로서도 EMR는 환영할 만하다. 수많은 환자의 진료기록이 데이터베이스화되기 때문에 질병에 대한 광대한 임상자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환자의 병력을 참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환자별로 기록된 자료를 하나씩 검토하고 통계수치를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화되면 의사들은 특정 질병별, 성별, 연령별 등 다양한 조건으로 과거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열람할 수 있어 의료기술 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기록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PDA나 휴대전화 등 이동통신 단말기를 이 시스템과 연동시키면 병원 안팎에서 얼마든지 진료활동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분당서울대병원과 서울삼성병원은 PDA와 EMR시스템을 연동시키고 있다. 의사들은 차트와 필름 대신 PDA를 들고 다니며 회진을 하고 있다.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자신의 병력을 의사가 손쉽게 참고할 수 있으므로 보다 섬세하고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다. 또 병원을 옮길 때마다 같은 검사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진다. 병원간에 설치된 전송망이나 인터넷망을 통해 정보를 전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발전한다면 병원을 찾지 않고 집에서 진단을 받을 수도 있다. 가정에 비치된 진단기기를 인터넷에 연결하면 검사결과를 의사가 보고 진단을 내릴 수도 있다. 병원과 약국이 연결돼 있다면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찾을 필요도 없어진다. 약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약이 나와 있을 것이다.사생활침해 등 해결과제 산적디지털병원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전자의무기록시스템을 구축하는 병원들도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분당서울대병원, 광주첨단병원 등 전국 4곳의 병원이 병원 전체에 전자의무기록을 채택하고 있으며 10여곳의 병원들이 부분적으로 EMR를 채용하고 있다. 또 경희대병원, 건국대 민중병원, 한림대병원 등 대학병원과 종합병원들이 EMR시스템 구축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어 내년까지 40~50여개 병원에 EMR가 도입될 전망이다.EMR 구축이 대세가 되면서 이 시장에 뛰어드는 업체들도 늘고 있다. 그동안 의료정보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비트컴퓨터, 하이케어시스템즈, 이지케어텍, 투윈정보시스템에 LG CNS, 삼성SDS, 현대정보통신 등 대형 SI업체들이 가세하고 있는 것. 이와 관련, 비트컴퓨터의 송인옥 과장은 “의료정보화사업은 시스템 노하우뿐만 아니라 의료분야의 전문지식도 필요한, 매우 복잡한 작업”이라며 “각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업체들이 컨소시엄 형태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례가 많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독자적으로 전체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라는 설명이다.디지털병원이 확산되는 추세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원격검진 등 EMR의 장점을 제대로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기록들이 원내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나 전용망을 통해 원외로 전송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각종 해킹이나 바이러스 등 보안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 환자의 기록이 해킹되는 경우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록의 오류도 발생할 수 있어 오진의 빌미가 될 수 있다.병원간 용어와 전송방식의 표준화도 정착돼야 한다. 같은 질병을 다르게 기록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병원들이 서로 다른 전송시스템을 사용하는 경우 기록이 전송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병원간 전송시스템의 표준도 마련돼야 한다.법적, 윤리적 문제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원격진료나 병원간 진료기록 교환을 통해 오진이 발생했을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기술적인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 해도 인터넷 기반의 EMR가 시행될지는 미지수다. 병원들이 자료를 교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자유롭게 이동하면 환자들은 동일한 검사를 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경영이 어려운 병원의 살림살이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정부가 합리적인 의료수가 정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진정한 EMR는 실현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용어나 전송방식의 표준화에도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