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거래·게임·메일·녹화 등 부가기능 대폭 강화… 고급형 시장 확대 추세

셋톱박스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이 본격화한 지 몇해 만에 가입자가 1,000만가구를 넘어서 어느덧 셋톱박스는 일상에서 친숙한 가전기기가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 사람들은 셋톱박스를 방송사에서 보낸 신호를 TV에 뿌려주는 단순한 신호전환기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아날로그 방송 환경에서 셋톱박스의 역할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정이 ‘확’ 바뀌고 있다. ‘쌍방향 방송’을 내세우고 있는 디지털 방송이 시행되면서 셋톱박스는 ‘신호전환기’에서 ‘홈엔터테인먼트의 본부’로 거듭나고 있다.신규시장으로 눈을 돌려라지난해 말 우리은행은 TV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T뱅킹 서비스’를 선보였다. 리모컨을 이용해 화면상에서 ‘T뱅킹’을 선택한 후 은행측에서 발급한 스마트카드를 이용해 계좌이체, 공과금납부, 계약해지 등을 할 수 있는 서비스다. 기존의 인터넷뱅킹에 비해 훨씬 간편하면서 스마트카드를 이용하므로 안전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스마트카드를 어떻게 이용한다는 것일까. 셋톱박스가 정답이다. ‘T뱅킹’을 위한 셋톱박스에 마련된 슬롯에 스마트카드를 삽입하면 고객정보가 입력, 은행으로 전송되고 이를 바탕으로 업무가 이뤄진다.T뱅킹은 셋톱박스로 할 수 있는 서비스의 한 예에 불과하다. 홈쇼핑을 시청하면서 바로 결제를 할 수 있는 T커머스, 주문형비디오(VOD) 및 음악(MOD) 서비스, 게임, 인터넷 검색, 여론조사 등 활용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PC에서만 가능했던 ‘쌍방향 송수신’이 TV에서도 실현되는 대목이다. 물론 디지털 방송이라는 환경하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미국, 일본, 프랑스 등 디지털 방송을 본격화하는 국가가 늘면서 디지털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TV와 셋톱박스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357만대에 불과했던 디지털TV 시장은 올해 1,000만대를 넘어 내년에는 1,886만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디지털방송 수신기의 주류는 디지털 셋톱박스다. 지난해에만 3,888만대가 팔렸고 누적 판매대수는 1억대를 훌쩍 뛰어넘는다.셋톱박스 시장의 성장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인스탯(In-Stat)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예상 판매대수는 4,369만대, 내년에는 4,838만대가 예상된다. 이미 디지털위성방송을 실시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조만간 디지털 케이블방송과 지상파 방송이 본격화될 예정이어서 셋톱박스 시장의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보인다.시장환경은 더할 수 없이 좋아지고 있지만 국내 셋톱박스업체들의 경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주요 판매지역인 중동과 유럽시장이 성장기를 넘어 성숙기에 접어든데다 중국 등 후발국가들이 저가형 제품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관련업체들은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우선 시장의 다변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동안 국내업체가 주력한 시장은 소매시장인 개방형시장(Open Market)이었다. 하지만 전체 시장에서 개방형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남짓에 불과한데다 저가형 제품들이 몰리면서 국내업체의 입지가 약해졌다. 시장의 80%는 방송사에 납품하는 폐쇄형시장(Closed Market)이다. 그러나 이 시장은 모토롤러, 톰슨 등 대형업체들이 과점한 상태여서 진입장벽이 높다. 휴맥스 등 국내 대표업체는 유럽 시장의 폐쇄형시장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업체들은 대부분 중소업체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구사하기 어렵다. 대신 이들은 남미, 아시아 등 디지털 방송을 시작하는 신규 폐쇄형시장을 노리고 있다. 이와 관련, 한단정보통신의 구본원 과장은 “이 시장은 규모가 작아 대형업체들이 들어오기 힘들다. 지역에 따라 사양을 맞춰야 하는데 시장이 작아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며 “개발 중심의 국내업체의 경우 얼마든지 사양을 맞출 수 있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인터넷방송으로 IP셋톱박스 호황 기대고급형 제품 개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보급형 제품은 후발국가들의 저가 공세에 밀려 더 이상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고가형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전략이다. 고급형 시장은 아직 규모는 작지만 매년 두 배 이상 커지고 있어 매력적이다.고급형 제품은 기존의 단순한 ‘신호전환기’에서 인터넷, 게임, DVD, 녹화 등 부가기능을 첨가한 것들이다. 특히 개인용저장장치(Personal Video RecorderㆍPVR)를 탑재한 제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방송 프로그램을 디지털 정보로 저장하는 장치인 PVR는 시청자 중심의 방송을 가능케 하는 혁신적인 도구로 평가된다. 기존의 아날로그 VCR는 녹화 방법이 복잡하고 화질이 떨어졌지만 PVR는 간편한 녹화와 고화질 재생이 가능할뿐더러 다양한 부가기능을 갖추고 있다. 화면상에서 간단한 설정만 해놓으면 시리즈물을 자동으로 녹화한다. <대장금>을 녹화하고 싶으면 방송 프로그램에서 <대장금>을 선택한 후 시리즈 녹화를 설정하면 마지막회까지 자동으로 녹화해준다. 이영애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모두 보고 싶다면 출연자 정보에서 ‘이영애’만 선택하면 된다. 보고 싶지 않은 광고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지나간 장면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국내업체 가운데 가장 앞선 PVR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디지털앤디지털의 김휘래 팀장은 “PVR시장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폭발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며 “조만간 TV나 냉장고처럼 필수적인 가전제품이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디지털 방송 못지않게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것이 인터넷 방송(IP-TV)이다. 말 그대로 인터넷 방송은 초고속인터넷망을 이용한 방송이다. TV와 인터넷선을 연결하면 인터넷의 콘텐츠와 서비스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게임, 메일, 전자거래, 영화, 음악 등 풍부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다.인터넷 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TV에 IP셋톱박스를 연결해야 한다. 이 장치가 인터넷을 타고 들어온 정보를 TV에 뿌려주고 시청자가 입력한 정보를 송출한다. 디지털 방송에서 디지털셋톱박스의 역할과 비슷하다. 하지만 IP셋톱박스의 진정한 잠재력은 홈서버로서의 가능성에 있다. 인터넷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가전의 원격제어, 보안장치 제어, 가정 내 디지털 가전의 네트워크 구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거대 통신사업자인 KT가 IP-TV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할 경우 방송과 통신시장에 미칠 파급력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국내 대표적인 IP셋톱박스업체인 티컴앤디티비로의 김종서 상무는 “IP-TV는 KT가 주관하는 사업인 만큼 미래의 유력한 방송 형태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프로토콜의 표준화만 이뤄진다면 조만간 IP셋톱박스를 중심으로 한 홈네트워크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홈네트워크의 서버 역할을 두고 PC와 TV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사실 셋톱박스가 그 역할을 맡을 공산도 적지 않다. 이는 셋톱박스가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는 기능에서 비롯한다. 홈서버는 특성상 네트워크 기능은 물론 최소한의 메모리 기능과 연산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한 24시간 내내 꺼져서는 안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제품으로 셋톱박스가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하지만 공룡기업 일색인 통신사, 가전사, PC업체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제휴와 협력을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