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438호 (2004년 04월 26일)

‘이태백신세 피하고 보자’ 심리 팽배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화이트칼라의 위기>라는 책이 있다. 미국의 질 안드레스키 프레이저가 쓴 것으로 화이트칼라의 현주소를 밀도 있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룸버그 퍼스널 파이낸스> 편집장 출신의 저자는 특히 월스트리트와 대형은행, IBM 등 다양한 직종의 현장을 누비며 화이트칼라의 비극적 실정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최근 국내에도 소개됐다. ‘이태백’이나 ‘사오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한국적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범위를 좀더 넓히면 화이트칼라의 위기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대졸 취업자들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각종 조사결과를 보면 어렵사리 취직한 20대 2명 중 1명은 안타깝게도 임시직으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 입장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위기를 맞기도 전에 임시직의 위기부터 맞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임시직 문제는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인건비 부담에 큰 위기를 느끼는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의 임시직도 크게 느는 추세다. 한국은행과 시중은행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은행들의 직원은 모두 12만6,000여명에 달한다. 이중 임시직을 포함한 비정규직이 3만6,600명으로 2002년 말보다 20.4%나 늘었다. 특히 신규채용자(7,500명) 가운데 무려 83%가 비정규직으로 나타났다. 대졸 취업자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인 셈이다.

대졸자들이 임시직으로 몰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일단은 들어가고 보자는 심리다. 취업 희망자들 스스로 실업자로 남아 있느니 차라리 임시직이라도 어딘가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임은지씨(25)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간 취업문을 노크했지만 여의치 않았다”며 “일단 지금의 직장에 다니며 다른 기회를 엿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특히 일부 기업들 사이에서 정식채용 때 임시직 경력을 인정해 주는 곳이 생겨나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확산되는 추세다. 김화수 잡코리아 대표는 “일부 취업 희망자들의 경우 일단 1년 내지 2년은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경력을 쌓고 이후 평생직장을 찾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하나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임시직을 권하는 측면도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나 서울시 등이 앞다퉈 일자리를 만드는 데 나서고 있지만 상당수가 임시직이다. 일단 급한 불을 끄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의 정책이 아니냐고 비판하지만 해당 부처에서는 그렇다고 영원히 일자리를 보장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입장이다.

20대 실업자들을 일컬어 ‘이태백 세대’라지만 실제 이태백은 ‘하늘이 준 재능은 쓰여질 날이 있다(天生我材必有用)’는 시구를 남겼다. 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 과연 젊은이들이 자기의 끼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날이 돌아올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해 쉽사리 ‘예스’라고 외칠 사람은 적어 보인다.

정권택 삼성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향후 경제상황이 호전되더라도 기업들의 디지털화, 사무자동화 등이 급속도로 진행돼 일자리가 늘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정부 차원에서 중소기업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인력의 해외진출 등을 추진해 임시직의 양산보다는 안정된 일자리를 만드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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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