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까지 2500만대… TV광고 170억달러 줄 듯

미국에서는 요즘 개인용 디지털비디오녹화기(PVR·미국 현지에서는 DVR로 통용되고 있다)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PVR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티보(TiVo)가 불붙인 PVR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PVR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장치. 비디오테이프 대신 자기장치인 하드디스크를 활용, 디지털로 프로그램을 보관하는 것이다.PVR는 편리함이 강점이다. 버튼 하나로 간단하게 프로그램을 녹화, 재생할 수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고 있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정지 버튼을 누르면, 실제로 일시정지가 된 것처럼 나중에 다시 돌아와 볼 수 있다. PVR를 갖고 있으면 이미 시작한 프로그램도 되돌려 볼 수 있다. PVR가 현재 방송되고 있는 모든 프로그램의 일정 분량을 녹화해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흥미 있는 프로그램을 발견했을 때 비디오처럼 앞으로 돌려 재생할 수 있다. PVR는 또 시청자가 원하는 시간에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게 해준다. 방송국에서 정한 시간이 아닌 자신이 편리한 시간에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방송의 선택권이 시청자에게 넘어온 것. 실제로 티보 보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60~80%가 프라임타임 프로그램을 다른 시간대에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PVR의 인기는 단순히 편리한 녹화 기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PVR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지겨운 광고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티보의 성공 모토도 ‘광고에서 해방’이었다. 미국 시청자들에게 광고는 그야말로 성가신 존재다. 미국은 프로그램 중간에 들어가는 중간광고가 허용돼 드라마의 흐름이 끊기기 일쑤다. 인기 프로그램은 5분 간격으로 광고가 나온다. 광고 때문에 텔레비전 시청시간도 길어진다. 광고만 건너뛰면 훨씬 짧은 시간에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미국 PVR 시장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해까지 미국 가정에 보급된 PVR는 320만대. 티보가 39%를 차지하고 있다. 티보는 PVR 분야에서 선두주자지만 예상보다 시장점유율은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이후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이 PVR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티보를 구입할 경우 대당 200~300달러가 들지만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신규 가입자에게 PVR를 무료로 제공한다. 따라서 티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시장에 파고들고 있다. PVR의 보급속도는 향후 더욱 빨라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양키그룹에 따르면 오는 2007년 미국 PVR 보급대수는 2,470만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케이블TV가 1,090만대, 위성방송은 990만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시장조사기관인 IDC는 전세계적으로 2008년까지 PVR 보급이 2,800만대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두 회사가 별개로 실시한 조사이긴 하지만 PVR 시장의 절대다수를 미국시장이 차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PVR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임워너(Time-Warner)는 지난해부터 PVR가 내장된 셋톱박스를 제공해 왔다. 셋톱박스는 케이블TV를 시청할 때 필요한 장치. 여기에 PVR를 기본사양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 타임워너 케이블TV 가입자 가운데 36만9,000가구가 PVR가 내장된 셋톱박스를 쓰고 있다. 미국 최대 케이블TV인 컴캐스트(Comcast)는 버지니아에서 PVR 시장성을 시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PVR의 월 사용료가 10달러 내외인 것을 고려하면 컴캐스트 전체 가입자 2,100만가구에서 10%만 PVR를 선택해도 매달 매출이 2억달러가 증가하는 셈이다. 컴캐스트에 따르면 버지니아 지역 가입자 중 10%가 PVR가 내장된 셋톱박스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컴캐스트도 조만간 전국을 대상으로 PVR가 내장된 셋톱박스를 공급할 것으로 보인다.위성방송은 케이블TV보다 한 발 앞서 PVR 시장에 진출했다. 미국의 대표적 위성방송인 디렉티비(DirecTV)와 에코스타(EchoStar) 가입자 중 175만가구가 이미 PVR를 보유하고 있다. 디렉티비는 전체 가입자 1,220만가구 가운데 75만가구에 PVR를 제공했다. 디렉티비는 가입자에게 티보를 제공하고 있다. 에코스타의 PVR 공급은 벌써 100만가구를 넘어섰다. 위성방송의 PVR 사용료는 월 5달러 정도로 케이블TV보다 매우 낮은 편이다.케이블TV와 위성방송의 PVR 시장 진출과 관련, 일각에서는 위험한 동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광고주의 압력 때문이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 가입자들의 PVR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광고주들은 PVR 보급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 가입자들의 요구와 광고주 사이에서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이 위험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PVR가 무조건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PVR 장비는 대당 300달러 정도로 아직은 비싼 편이다. 케이블TV에 매달 수수료 수익이 돌아가지만 장비가격이 내려가지 않으면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다.PVR의 등장으로 대형 지상파 방송국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케이블TV및 위성방송과 달리 수익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국들에 PVR가 큰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PVR 보유 가구의 60~70%가 광고를 보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JP모건이 광고주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PVR 보급률이 30%를 넘어서게 되면 75%의 광고주가 광고비를 22% 이상 줄일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고시장이 170억달러나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JP모건의 조사는 PVR 보급이 광고시장 자체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우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JP모건의 스펜서 왕 애널리스트는 “지상파 방송국이 당장 피해를 입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PVR는 광고시장의 구조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했다.PVR는 광고주들을 우려하게 만드는 새로운 트렌드도 낳고 있다. 시청률 조사기관인 닐슨미디어리서치는 PVR 보유자의 60%가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을 켜 놓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 프로그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일부 프로그램만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고주들이 일부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소비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특정 프로그램에 광고를 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방송국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시청자들이 일부 프로그램만 보게 되면 비인기 프로그램은 지금보다 더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된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하기도 어려워진다. 새 프로그램에 대한 노출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PVR로 재방송시장도 크게 위축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은 재방송률이 매우 높다. 일부 프로그램은 대형 지상파 방송국간에 판권을 사서 방송하기도 한다. 예컨대 KBS에서 만든 인기 드라마를 MBC에서 방송하는 셈이다. 게다가 100여개가 넘는 다양한 케이블 채널들은 상당수의 프로그램을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재방송에 의존하고 있다. PVR가 확산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PVR에 저장시켜 놓고 시청할 수 있어 굳이 재방송을 보지 않아도 된다. 재방송 광고시장이 줄어드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미국에서 PVR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미국 가정은 대부분 케이블TV를 통해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최근에는 위성방송도 시장을 넓혀 가고 있다. PVR의 잠재시장이 큰 것이다. 특히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은 신규 가입자에게 PVR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향후 PVR의 보급이 더욱 빨라질 것이다.PVR는 텔레비전이 보급된 이후 처음으로 미국인들의 텔레비전 시청습관을 바꾸고 있다. PVR의 영향을 정확히 예측하긴 어렵지만 시청습관만큼이나 텔레비전 비즈니스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