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뜀박질 단계에 불과합니다만 한ㆍ일 양국 운송업계에 꼭 필요한 기업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28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 땅을 처음 밟은 후 불과 15년 만에 일본 물류업계의 주목받는 경영자로 자리매김한 국제익스프레스의 나승도 사장(44). 서울지사 방문 길에 기자와 만난 그는 “이제 걸음마 수준을 벗어났으니 이윤환원을 통해 사회와 고객기업에 봉사하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도쿄 신주쿠에 본사를 둔 종합운송 물류업체 국제익스프레스는 한국인들에게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 그러나 재일교민 사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진입장벽이 높고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일본시장에서 국제익스프레스는 재일교민들의 자존심을 대표하며 화제와 바람을 몰고 다니기 때문이다.나사장은 몸 하나와 바위 같은 의지를 밑천 삼아 지난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식사택배 서비스 사업으로 익힌 노하우와 경험을 살려 재팬 드림을 실현시켜 보겠다는 일념에서였다.국제익스프레스의 모태가 된 (주)국제를 설립한 것은 1990년. 알토란같이 모은 300만엔이 종자돈이 됐다. 초기 사업은 주재원, 유학생의 이삿짐 등 소화물 운송이 중심이었다. 크고 작은 경쟁업체들이 수두룩한 일본시장에서 나사장과 국제익스프레스를 주목한 눈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타고난 성실성에 고감도 서비스와 원가절감 노력이 겹쳐지면서 국제익스프레스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수출입 화물과 일본에서 각종 행사를 치르기 위해 한국기업들이 운송해 오는 이벤트 화물로 업무영역을 넓히자 명성은 급속도로 높아졌다.“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일본의 내로라하는 물류회사가 막판에 포기한 일을 국제익스프레스가 달려들어 수일 만에 거뜬히 해치운 것입니다. 일본 물류업계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업체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나사장은 가장 값진 추억으로 2002한ㆍ일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에서 열렸던 한국문화전의 준비를 꼽는다. 행사 개막일은 코앞에 다가왔지만 원래 일을 맡았던 일본 물류업체가 작업의 어려움과 문화재 취급에 따른 위험부담을 의식, 두손을 들자 주최측이 황급히 국제익스프레스에 일을 맡겼던 것. 한국인 특유의 추진력을 앞세워 임직원 모두가 똘똘 뭉쳐 일을 성공리에 끝내자 일본측에서는 감탄과 찬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국제익스프레스는 2003년 11월 까다롭기로 소문난 요코하마 항구의 보세창고에 독자 창고를 따냄으로써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외국 운송업체에는 철옹성이나 다름없던 이곳이지만 완벽한 일처리 솜씨와 신용이 일본업체들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거뜬히 자체 창고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 나사장의 귀띔이다.“대기업들에 비하면 힘도 달리고 조직, 자금도 열세입니다. 그러나 한ㆍ일간을 오가는 화물취급에서는 최고의 기업이라는 소리를 듣도록 할 각오입니다.”신세대 재일경영자로는 최고의 파이어니어로 평가받는 나사장은 ‘으뜸기업’을 만들어 고객과 한국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종업원 55명에 2003년 매출은 21억엔. 2004년은 26억엔을 바라보고 있다.약력1961년 나주 출생, 국민대 행정학과 졸업1990년 (주)국제 사장1994년 국제익스프레스 사장1996년 국제로지스틱스 사장(겸직)한국경영자동우회 회장(일본 도쿄), 동경한국학교PTA 부회장, 재일한국인연합회 부이사장, 요코하마세관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