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1일 오후 기자는 칠레 산티아고의 베니테즈 국제공항 계류장에 있었다. 대한항공 보잉747-400, KE1001편은 귀국길에 앞서 중간경유지인 하와이로 14시간20분 비행을 위해 막 이륙하려던 참이었다. 특별기는 바로 옆에 정류 중인 ‘日本國 JAPAN’이라는 붉은 국적표시 글씨와 꼬리부분의 일본항공자위대 표시가 선명한 두대의 일본 특별기를 뒤로한 채 계류장에서 활주로로 이동했다. 쌍둥이 같은 두 대의 일본 보잉747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12차 아시아ㆍ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총회 참석차 타고 온 것이었다.활주로 옆 칠레 공군 전투기들이 비상발진 대기 중인 옆을 지나 KE1001이 이륙 위치로 이동하는 사이 기자의 눈에는 또 다른 쌍둥이 비행기가 들어왔다.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커다란 영문이 항공기 옆면을 가득 채운 그 비행기 역시 외형은 대한항공 특별기와 같은 보잉747 모델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전용기였다.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거쳐 칠레로 간 대한항공 특별기의 맨 앞쪽 공간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타고 있었다. 한국의 APEC 참가단 일행을 태운 이 비행기에는 정부의 공식대표단과 비공식 수행공무원들, 취재기자단, 승무원 등 180여명이 타고 있었다. 미국의 참가인원은 이보다 많은 250명 가량이었고, 일본 방문팀은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미국과 일본이 두 대의 전용기를 동시에 이용하는 것은 안전 때문이라고 한다. 부시나 고이즈미는 혹 타고 온 항공기에 이상이 있으면 예비용인 다른 한 대를 이용, 차질 없이 귀국하기 위한 대비라는 것이다.부시 대통령의 전용기 바로 옆에는 낯익은 또 다른 비행기 두 대가 칠레 땅에 서 있었다. 비행기 지붕 위에 커다란 둥근 접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US Air Forces’(미공군)라는 글자가 뚜렷한 그 비행기는 공중경계관제비행기(AWACS)였다. 전쟁과 전투, 군사력과 관련된 모든 기본정보를 수집하는 움직이는 레이더기지,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때면 날아와 한반도 일대를 손금 들여다보듯이 감시하는 그 첨단설비의 비행기다.워싱턴에서 칠레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도 한국~미국만큼은 되지만 자국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맞아 만에 하나 안전을 위해 출격한 것이다. 국제간 다자 정상회의가 열리면 해당 국가는 경찰력은 물론 군에까지 비상근무에 돌입케 하면서 통상 최고수준의 경계령을 편다. 기자는 지난해 10월 발리에서 아세안(ASEAN)+3(한ㆍ중ㆍ일) 정상회의가 열릴 때 그 휴양지 바닷가 주변을 오가며 경계대기 중인 인도네시아 군함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정상회의 참석자들은 각국의 대표(국가원수)이지만 국력만큼이나 이렇게 ‘행차’에도 차이가 난다. 미국과 러시아는 거의 유이(有二)하게 국제회의장에서도 주최국의 배려를 배제한 채 자국에서 공수한 전용승용차를 이용하겠다고 고집해 빈축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들이 이를 용인하는 게 현실이다.앞서 노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북핵문제 해결 등을 위한 회담을 갖기 위해 그가 머무르고 있는 산티아고 하얏트호텔로 찾아갔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 위해서도 그가 묶는 메리어트호텔로 찾아갔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국제회의 때 빈번히 이뤄지는 정상회담은 해당 회의 기준으로 양국이 서로 교환방문하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쉬운 상황이어서) 먼저 만나자고 하는 쪽이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노대통령이 부시나 후진타오를 찾아간 것 자체에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같은 때 열린 한ㆍ캐나다, 한ㆍ호주 정상회담에서는 상대방들이 노대통령의 숙소인 셰라톤호텔로 찾아왔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자간 국제회담에서 진행과정을 보면 대통령이나 왕이라 해도 국제무대에서는 똑같은 국가원수는 아닌 것 같다. 엄연히 힘이 세어 ‘자기 뜻대로’인 나라도 있고 아쉬운 입장일 수밖에 없는 국가가 명확히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국에서 전용차량을 가져온 경우는 허용한다’는 관행이 생겨났지만 현지에서 한국의 에쿠스 차량을 동원해 노대통령을 태우려는 우리 외교팀의 노력은 성사되기가 어려웠다.전용기 문제는 이전 정부 때부터 이따금씩 구입문제가 거론됐다. 그러나 우리 국력의 수준으로 보나 근래 어려워진 경제난을 감안할 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많다. 현 청와대 참모들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2,000억원씩 들여 전용비행기부터 사자는 주장이 아직까지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일 것이고, 국가의 힘 크기가 그대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외교무대의 현실일 것이다. 국제회의 참석 횟수가 쌓일수록 노대통령뿐만 아니라 참모들도 조금씩 실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