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질주하던 러시아 경제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유코스에 대한 경매가 속전속결로 강행되고,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 개입이 점점 노골화되면서 투자심리마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월스트리트저널>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정치적인 이유로 ‘유코스 해체작업’을 강행하면서 외국인투자가의 신뢰도 추락과 투자금 이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경제권력을 장악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야욕은 유코스 사태에서 잘 드러난다. 유코스의 핵심 자회사인 유간스크네프테가스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무명의 바이칼파이낸스그룹에 낙찰됐다. 93억달러로 유간스크네프테가스를 사들인 바이칼파이낸스는 이번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이 ‘급조한’ 회사로 보인다. 국영 가스프롬이 세운 유령회사라는 설과 크렘린과 가까운 석유재벌인 수르구트네프트가스가 배후에 있다는 설 등 이 회사의 배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어쨌든 이번 ‘유코스 해체’는 에너지산업을 국가통제 아래에 두기 위해 푸틴 대통령이 2년여에 걸쳐 추진한 치밀한 작업 끝에 나온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러시아 정부의 에너지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는 앞으로 에너지를 무기로 삼아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이며, 푸틴 대통령의 권력독점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서방언론들은 분석했다.석유수출은 러시아 경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성장엔진이다. 그러나 유코스 사태의 파장이 확산되면서 러시아 석유기업들은 올 들어 10월까지 투자규모를 지난해보다 20%나 축소했다. 투자감소 여파로 석유생산 증가율은 지난 6월 9.5%에서 10월에는 7%로 둔화됐다.석유기업들의 투자축소는 경제 전반의 소비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기업 구매담당자들의 경기판단지표인 ‘모스크바 나로드니 은행 구매자관리자지수’는 11월까지 5개월 연속 하락했다. 11월 구매자관리지수는 지난 98년 러시아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유코스 사태 이후 석유기업뿐만 아니라 기타 분야의 기업들도 정부 탄압을 두려워하며 러시아 시장을 떠나고 있다. 투자은행인 유나이티드 파이낸셜그룹의 크리스토퍼 그랜빌 이사는 “기업인들은 ‘제2의 유코스’가 누가 될지에 불안해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석유수출 등으로 벌어들인 수익금을 투자하기보다 숨기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글로벌 달러 약세에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오일머니가 유입, 루블화 가치가 치솟고 있는 점도 불안요소다. 루블화 가치 급등은 제조업체들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켰고, 해외수입만 늘렸다. 특히 1~11월 구소련 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30%나 불어났다. 해외 수입 증가는 러시아 내 제조업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로 지목된다. 특히 소비재 수입 증가는 산업다각화의 최대 걸림돌로 지목되고 있다.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러시아 경제개발통상부는 최근 200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보다 0.5%포인트 낮은 5.8%로 하향 조정했다. 2004년 성장률 전망치 역시 2003년 실적(7.3%)보다 낮은 6.8%로 제시했다.경제개발통상부의 대표적 개혁파 관료인 안드레이 샤로노프 차관은 “세무당국이 공격적인 세무조사를 계속 밀어붙일 경우 2005년 성장률은 3~4%대로 추락할 수도 있다”며 “기업인들을 죄인 취급하는 현 상황이 지속되는 한 유가상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는 성장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경제성장 둔화는 유코스 해체작업을 주도했던 푸틴 대통령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센터가 지난 11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러시아 국민의 75%는 ‘경제정책에 실망했다’고 답했다.98년 금융위기를 잠재우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은 푸틴은 당시 “향후 10년 안에 러시아 경제규모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연간 7%의 성장률 달성이 필요하지만 푸틴 집권 후 성장률이 7%를 넘은 해는 2000년과 2003년 두 차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