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474호 (2005년 01월 03일)

모방에서 창조로, 삼류에서 일류로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1

‘모방에서 창조로.’

이 한마디로 한국산업의 기술발전사는 요약된다. 해방 후만 하더라도 국내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6ㆍ25전쟁으로 생산시설은 대부분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주영, 이병철을 위시한 한국산업의 역군들은 기술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술개발에 대한 기업인들의 의지는 불같았고 독자개발의 성과도 하나둘씩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한국산업의 위상도 한단계 한단계 올라섰다. 한국산업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기술들을 살펴본다.

전자산업 가능성 일깨운 국산 TV

섬유산업은 산업화 초기 한국의 수출을 이끈 대표품목이다. 한때 전체 수출량의 40%가 섬유였을 정도다. 이런 성공을 거둔 데는 효성(당시 동양나이론)의 나일론 국산화의 공이 크다. 효성은 65년 나일론 원료의 국산화에 이어 68년에는 울산에 대규모 공장을 준공, 의류용은 물론 산업용 원사까지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제품들은 섬유산업의 요람인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호평을 받으며 한국 섬유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기여했다.

효성이 97년 대량생산에 성공한 ‘스판덱스’는 한국의 섬유산업이 가격이 아니라 기술기반으로 전환하는 시발탄이었다. 당시 ‘스판덱스’는 ‘섬유의 반도체’라 불릴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았지만 미국, 일본, 독일만이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 장벽이 높았다. 효성은 10년에 걸친 시행착오와 연구 끝에 97년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제품가격도 현실화돼 국내 화섬업계의 원가절감에도 적잖게 기여했다. 효성은 2002년에 세계 2위의 스판덱스 생산업체로 발돋움했고 2005년 중국공장이 가동하면 세계 최대의 생산업체에 오를 전망이다.

66년 LG전자(당시 금성사)가 선보인 최초의 국산 흑백TV는 가전산업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은 사건이었다. 모델명 ‘VD-191’로 명명된 이 TV는 진공관식 19인치 제품이었다. 시판되자마자 ‘VD-191’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요가 몰려 추첨을 통해 당첨자에게만 제품을 판매할 정도였다.

83년 LG화학(당시 럭키)이 개발한 PBT수지는 한국 화학산업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이 수지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의 일종으로 전자, 전기, 자동차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제품이다. 개발 당시 EP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일본, 독일뿐일 정도로 첨단기술이었지만 LG화학의 제품은 오히려 이들보다 저렴하고 기능이 우수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PBT 국산화를 계기로 국내 플라스틱 소재산업은 물론 전기, 전자, 자동차, 기계공업의 기술발전에 가속도가 붙는 효과가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91년 개발한 알파엔진은 해외기술에 의존하던 국내 자동차산업의 ‘독립선언’으로 평가된다. 1,500cc급인 알파엔진은 멀티밸브식 가솔린엔진으로 컴퓨터로 연료분사, 점화시기 등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급 엔진에 비해 출력과 연비가 좋아 기껏해야 30년 전 미쓰비스 엔진 정도일 것이라고 짐작하던 해외 기술진을 경악시켰다. 터보과급기를 적용해 공기와 연료를 다량으로 연소시킨 것이 비결이었다.

현대자동차가 알파엔진 개발에 착수한 것은 83년이었다. 84년 영국 리카르도사의 도움을 받아 5년 6개월 만에 빛을 봤다. 하지만 리카르도사는 보안상의 이유로 기술이전에 적극적이지 않아 개발과정은 어렵기만 했다. 개발자 모두 엔진개발 경험이 전무해 사소한 오차를 극복하는 데도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현대자동차는 91년 알파엔진 공장을 준공하고 국내최초의 스포티카인 스쿠프에 이 엔진을 장착해 로열티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알파엔진 개발 성공 후에도 현대자동차는 베타엔진, 델타엔진, 쎄타엔진 등 자체 엔진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세계 최고의 CDMA 선진국

반도체산업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간산업이다.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D램의 경우 세계 최대 생산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산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늦게 출발해 단기간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국내 반도체산업의 역사는 삼성전자와 맥을 같이한다. 73년 이름조차 생소한 반도체산업에 뛰어들어 20년 동안 줄곧 선진업체의 뒤를 쫓기 바빴다. 하지만 92년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을 개발하며 세계 D램 시장의 최고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한 것은 94년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다. 개발환경은 좋지 않았다. 92년 개발팀 결성 당시에는 64메가 D램에 우수인력이 집중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개발자를 중심으로 팀을 꾸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연구진은 오히려 참신한 아이디어로 개발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키는 개가를 이뤄냈다.

당시 전세계 대부분 개발자들은 256메가 D램을 직접 만들려고 했지만 삼성의 연구진은 기존에 상용화된 16메가 D램에 256메가 D램의 사양을 적용하기로 했다. 1년 만에 가능성을 확인한 삼성은 93년 말 완전한 샘플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선진국보다 6개월에서 1년이나 먼저 256메가 D램을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동통신 선진국이다. 이는 96년 SK텔레콤(SKT)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이동통신의 공이 크다. SKT는 92년 이동통신의 원천기술을 CDMA방식으로 표준화한다는 체신부의 결정과 함께 CDMA상용화 작업에 착수했다.

CDMA의 원천기술은 미국의 퀄컴사가 이미 개발한 상태였지만 이를 상용화한 곳은 지구상에 단 한곳도 없어 SKT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드디어 94년 11월 시험통화에 성공한 데 이어 96년 1월 인천, 부천지역에서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의 CDMA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인정받으며 경쟁국을 압도하고 있다.

CDMA 상용화와 함께 휴대전화 단말기의 신화도 시작됐다. 그 선두는 삼성전자의 ‘애니콜’이었다. 삼성전자는 95년 8월 세계 최초로 CDMA 디지털 휴대전화를 개발하며 CDMA 단말기의 선두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 제품은 한국지형에 적합한 주파수 접속 소프트웨어 기술을 적용해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마케팅 문구와 함께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전자는 단말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계적인 선진업체들을 제쳐 나갔다. 현재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단말기 부문에서 노키아에 이어 세계 2위 업체로 성장했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생산능력,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경쟁국을 월등히 앞서 있다. 70년대 시작됐으니 불과 30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2류에 불과했다. 고부가가치선인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LNG운반선은 흔히 ‘조선산업의 꽃’으로 불린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극저온을 견뎌야 하고 아주 작은 누설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94년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국내 최초의 LNG운반선은 조선산업의 새로운 이정표로 기록될 만하다. 이후 현대중공업은 99년 국내 최초로 해외수주를 유치하는 데 성공하며 LNG운반선 경쟁에 나서기 시작했고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이 그 뒤를 따라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2004년 현재 한국은 전세계 LNG선을 100% 가까이 ‘싹쓸이’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조선업계 지존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스코가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 기술은 한국 철강산업의 기술력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 기술은 원료탄과 철광석을 사전 처리하는 코크스공장과 소결공장을 거칠 필요가 없어 설비투자비와 원재료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물질의 배출량도 90% 가량 감소시키는 장점이 있다. 92년 개발에 착수한 포스코는 98년 파일럿 플랜트를 운영하며 상용화 기술을 발전시킨 후 2003년부터는 연산 60만t 규모의 데모 플랜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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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