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474호 (2005년 01월 03일)

산업 고도화 이끈 ‘불도저 경영인’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긍정적인 생각을 가집시다.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2001년 3월21일 세상을 떠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영결식장에는 평소 고인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말이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의 인생은 그의 말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86년이었다. 한국산업사의 고비고비마다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발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며 한국산업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대해 간 것이다. 전후의 황폐해진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현재까지 한국의 주요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자동차, 건설, 조선 등 주요 기간산업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하고 성장했다.

해외건설 진출의 개척자

현대그룹의 주력 중 주력인 자동차사업은 청년시절부터 정명예회장의 꿈이었다. 최초의 인연은 194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정비업체를 일으킨 것. 하지만 오래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따라 43년 정비업에서 손을 떼야 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그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창립하며 자동차사업에 복귀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은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했다. 이에 따라 정명예회장은 한동안 자동차사업의 꿈을 미뤄야 했다.

본격적인 자동차사업 진출은 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최대 전환점은 73년 자동차 독자생산 결정이었다. 당시 자본금 17억원에 불과한 현대가 연산 5만대 규모의 공장을 짓겠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저었지만 정명예회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였고 드디어 76년 국내 최초의 독자 브랜드인 ‘포니’가 탄생했다. 그후 현대자동차는 86년 엑셀이 해외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 브랜드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2004년 현재 현대자동차는 세계 7위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했다.

필생의 꿈인 자동차사업과 거리를 둬야 했던 50~60년대 정명예회장이 전력을 기울인 분야는 건설이었다. 50년 창립한 현대건설은 62년 국내 도급한도액 1위에 오르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국내 건설 1위로 만족하지 않은 정명예회장은 65년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수출뿐”이라는 평소의 소신에 따라 해외건설시장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 포문이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이었다. 당시 주위에서는 국내자본과 기술수준으로는 어림없다고 우려했고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열악한 현지 기후, 토질을 극복할 수 있는 기술력이 부재했던 것. 결국 현대건설은 이 공사로 적자를 봤지만 공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60~70년대 국민경제를 이끌어갈 해외건설시장 진출의 초석을 마련했다.

해외건설 진출의 최대 업적은 76년 수주한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공사였다. 공사액은 9억3,000만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이 공사에서 정명예회장은 세계 건설사에 유례가 없는 일을 시도, 성공했다. 국내에서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제작해 바지선으로 현지까지 실어온 것이다.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건너야 하는 이 아이디어는 ‘미친 짓’에 가까웠지만 정명예회장은 수십차례에 걸친 운반작업을 성공시켰다.

태국과 사우디의 공사를 성공시킨 현대건설의 해외시장 진출은 속도를 더해갔다. 베트남, 괌, 인도네시아, 호주 등에 잇달아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등 중동 일대의 대형공사를 연이어 수주하면서 70년대 후반 중동특수를 선도했다.

국내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도 정명예회장의 불도저 리더십은 빛을 발했다. 착공 후 불과 290일 만에 현대건설이 시공한 구간의 고속도로를 완공했다. 이는 세계 건설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소양강댐 건설도 유명하다. 당초 콘크리트댐으로 설계된 것을 정명예회장은 모래, 자갈을 이용한 사력댐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콘크리트를 이용하면 자재를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다 운송비 부담도 커져 비용이 엄청나다는 이유였다. 물론 주위의 반대가 들불처럼 일었지만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 예산을 크게 절약하는 성과를 냈다.

현대조선소 창업 당시의 일화는 거칠 것 없는 정명예회장의 사업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선박이란 바다 위를 떠다니는 탱크’에 불과하다며 의욕적으로 조선산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하지만 정명예회장에게는 창업자금이 없었다. 이에 그는 영국과 스위스 등에 차관을 요청했지만 그들에게 보여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업 전이었으니 수주실적도 조선소도 없었던 것이다.

수주를 위해 정명예회장은 그리스의 리바노스사로 날아갔다. 이때 정명예회장이 내민 것은 거북선이 새겨진 지폐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이 전부였다.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든 저력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로 그는 리바노스사를 설득, 2척의 유조선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현대중공업은 73년 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진수식을 하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그룹의 중단 없는 약진에는 정명예회장의 불도저 리더십뿐만 아니라 ‘신용’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경영관도 한몫 했다. 일례로 현대건설의 초창기 시절인 53년 고량교 건설을 들 수 있다. 전쟁 직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홍수 등으로 공사기간은 지연되고 비용이 증가했다. 공사를 포기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지만 정회장은 ‘사업은 신용’이라는 소신대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결국 공사는 계약 시한보다 2개월 늦게 완공, 현대건설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일은 전화위복이 됐다. 신용을 지키는 정명예회장의 태도에 공감한 정부측이 대부분의 정부공사를 현대에 맡겼기 때문이다.

정명예회장은 기업인으로서의 업적도 출중했지만 민간경제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77년 이름만 있었을 뿐 별 역할을 하지 못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11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재계의 힘을 결집하고 경제인들의 발언권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정명예회장은 규제완화, 저금리 정책 등 기업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사퇴압력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5공화국 당시 정부가 사퇴를 종용하자 “권력이 전경련 회장을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며 응수했던 것이다.

정명예회장의 불도저 경영은 한국 체육산업의 발전에 증폭제 역할을 했다. 88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장을 맡아 올림픽을 유치한 것. 64년 도쿄올림픽을 보면서 ‘우리도 올림픽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정명예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리는 독일 바덴바덴으로 날아갔다. 현지에서 그는 독일 주재 현대그룹 임직원을 총동원해 IOC 위원들을 설득, 결국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공시켰다.

말년의 정명예회장은 남북경제협력에 온힘을 쏟았다. 최초의 시도는 89년에 있었다. 처음으로 방북, 김일성 주석을 만나 ‘금강산 남북공동개발의정서’를 맺은 것. 하지만 이 의정서는 남북의 긴장 악화로 인해 빛을 보지 못했다.

본격적인 대북사업은 98년 ‘소떼 방북’을 기점으로 불이 붙었다. 500마리의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통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을 약속받은 것. 이후 정명예회장은 지속적인 대북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창립했다.

하지만 대북사업은 너무 많은 희생을 가져왔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적자가 누적됐으며 이로 인해 결국 아들 정몽헌 회장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정명예회장의 대북사업의 의미가 폄하될 수는 결코 없다. 남북경제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자체를 호전시키는 데도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요즘 정명예회장이 남긴 말은 음미할 만하다.

“나는 경제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온 국민의 진취적인 기상, 개척정신, 열정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적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약력 : 1915년 강원도 통천 출생. 38년 경일상회 설립. 40년 아도서비스 설립. 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47년 현대토건 설립. 50년 현대건설 설립. 65년 태국 고속도로 사업 참여. 67년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 71년 현대그룹 회장 취임. 73년 현대조선 설립. 76년 현대종합상사 설립. 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83년 현대전자 설립. 87년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89년 북한 방문. 92년 제14대 대통령 출마. 98년 소떼몰이 방북, 금강산 개발 관광사업 합의. 99년 현대아산 설립. 2001년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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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