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제 474호 (2005년 01월 03일)

‘재계 선구자’…도전과 개척의 역사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호암(湖巖ㆍ고 이병철 회장 호ㆍ1970~1987년)이 남긴 공로는 실로 대단하다. 한국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 그 이상을 공헌했다. 그의 삶은 한국경제 발전사와 함께해 왔다. 일제치하였던 1938년 사업에 투신한 이래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동시에 불모의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운 재계의 선구자이자 한국기업인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경제는 오늘의 반석에 올라설 수 있었다. 호암은 걸출한 글로벌 기업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그의 평전을 낸 적 있는 홍하상 작가는 “일본에 마쓰시다, 미국에는 잭 웰치, 그리고 한국에는 이병철이 있다”고 거침없이 평가한다.

호암의 인생과 삼성의 성장스토리는 한마디로 도전과 개척의 역사다. 삼성 앞에 ‘최초ㆍ최고’라는 단어가 붙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일례로 53년 국내 최초로 국산 설탕(제일제당)을 생산했고, 56년에는 양복지의 대명사 골든텍스(제일모직)를 처음으로 내놓았다. 그후에도 시대흐름을 적시에 포착, 기민한 대응으로 왕성한 기업가 활동을 반복했다. 그의 기업가적 감각이 녹아난 하이라이트는 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세울 때였다. 당시 반도체는 최첨단 기술집약산업으로 미국, 일본 정도가 겨우 사업가능성을 확인한 초기단계 모델에 불과했다. 따라서 삼성의 반도체 진출은 지극히 무모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 반도체는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효자품목이다. “당장의 이익보다 내일을 보라”는 그의 비전이 이룬 성과다. 그렇지만 숱한 기업을 창업하면서도 부실기업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호암에게 부실기업은 죄악이었던 결과다.

그는 평생 ‘봉사’를 최고의 화두로 삼았다. 대상은 국가와 민족이었다. “기업이 인생의 전부였고, 나의 갈길은 사업보국에 있다”(76년 <전경련회보> 기고문)는 말처럼 국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이는 호암의 경영철학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돈벌이라는 사적인 탐욕을 넘어 공익을 앞세운 일류사업가였다. 작게는 국가봉사부터 크게는 인류번영에 기어하고자 매진했다. <호암자전>에서 그는 “나는 남보다 특출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국가, 사회의 진운(進運)에 공헌한다는 신념 아래 새 사업을 연구ㆍ개척해 왔을 따름이다”고 겸허해한다. 또 호암은 제조업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사회에 적극 환원했다. 문화재단을 설립해 국가가 미처 못다한 학술ㆍ육영활동을 지원했다. 사회의 복지증진 없이 기업의 영속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한국 근대기업 사상 최초로 인적자본론을 펼친 인물이다. 이른바 ‘인재 제일주의’로 표현되는 그의 인재관의 정착이다. 그는 사업이란 자본보다 사람이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금의 ‘삼성사관학교’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연줄은 배제하고 오로지 능력주의에 입각해 사람을 뽑도록 했다.

호암은 평소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며 인재제일, 인간본위를 실천해 왔다. 또 “난 도장을 찍어본 적이 없다. 도장을 가장 잘 찍는 사람을 뽑을 뿐이다. 내 인생의 80%를 사람에 신경을 썼다”고 할 만큼 인적자본을 중시했다. 아들인 이건희 회장도 부친의 영향을 톡톡히 받았다. 인재론을 포함한 몇몇 리더십은 청출어람이 따로 없다. 창업한 아버지의 혹독한 경영수업이 아들의 수성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호암은 미래지향적 인물이다. “발전이 멈추면 그것이 곧 죽음이다”(76년 신문회고)며 “10년 후에 대비하라”(77년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고 일찌감치 강조했다.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이었던 수입대체산업을 주도한 간판기업인답게 끊임없이 향후의 수익모델을 찾아다녔다. <호암자전>에서 “무수한 기업을 창설, 운영해 왔는데, 이는 참으로 전인미답의 처녀지였다”며 가진 것 없는 한국경제가 살아남을 길은 도전, 개척뿐이라고 역설했다. 호암 사후 93년 시작된 ‘신(新)경영’은 이 같은 선대회장의 고민을 구체화한 플랜이다. 삼성은 이제 개인기업이기보다 국가기업이다. “21세기를 향한 국가부국의 초석이 된다면 좋겠다”는 호암의 바람이 실현된 결과다.

약력 : 1910년 경남 의령 출생. 34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과 중퇴. 36년 협동정미소 설립. 38년 삼성상회 설립. 48년 삼성물산공사 사장. 53년 제일제당 사장. 54년 제일모직 사장. 61년 삼성물산 회장. 61년 초대 전경련 회장. 64년 한비 사장. 65년 중앙일보 사장 및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68년 중앙매스컴 회장. 71년 삼성공제회 이사장. 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80년 중앙일보 회장. 87년 별세 △저서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 등

기업인 3위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세계 일류 향한 ‘개혁 선봉장’

소니 버금가는 브랜드 가치 일궈…다음 목표는 ‘존경받는 기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62)은 개혁의 CEO다. 1987년 취임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화와 일류를 향한 걸음을 멈춘 적이 없다. 그 과정에서 삼성은 ‘국내 대표기업’에서 ‘세계 일류기업’으로 재탄생했다. 단 한 개도 없던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이 D램 반도체, 낸드 플래시 메모리, CDMA 휴대전화 등 18개나 생겼고 브랜드 가치는 세계 21위로 소니를 압박할 정도이며 매출액은 연간 정부예산을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삼성, 역전의 방정식’이라는 특집기사에서 ‘이건희 회장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경영자가 없는 것이 일본 기업의 최대 약점’이라며 이회장을 극찬한 바 있다. 개혁을 향한 이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없었다면 오늘날 삼성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최초의 개혁은 88년 회장 취임 1주년에 맞춰 시작됐다. 삼성 창립 50주년인 88년을 ‘제2창업의 해’로 선언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제일제당, 한솔그룹, 새한미디어, 신세계백화점을 분사시키고 전자, 반도체, 통신을 하나로 묶어 현재의 삼성전자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2창업 선언 후 5년째인 92년. 삼성의 매출은 87년 13조5,000억원에서 35조7,000억원으로 2배 가량 증가했으며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조6,000억원으로 3.6배 불어났다. 뛰어난 성적표였지만 이회장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도 세계 일류에는 한참 못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 일류를 향한 이회장의 집념은 93년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불리는 ‘삼성 신경영 선언’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변하는 것이 일류로 가는 기초이다. 앞으로 5년이면 회장 취임 10년인데 10년 해서 안된다면 내가 그만두겠다. 자기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

93년의 선언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제2창업을 하고도 여전히 2류에 머물고 있는 삼성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이회장의 행보가 구체화된 것뿐이다. 예를 들어 이회장은 93년 신년사에서 주력 사업체인 삼성전자를 암환자에, 중공업을 영양실조 환자에 비유했을 정도로 개혁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양(量)의 경영에서 질(質)의 경영으로 전환한 이회장은 개혁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우선 제품의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생산공정에 ‘라인 스톱제’를 도입하고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하는 ‘7ㆍ4제’를 실시했으며 ‘신문고제도’를 만들어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했다. 95년에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500억원 상당의 제품을 불태운 ‘불량제품 화형식’을 불사하며 ‘일류화’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나갔다.

개혁의 결정적 계기는 IMF 외환위기였다. 굴지의 대기업들마저 연이어 무너지자 삼성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계열사를 매각해 부채를 줄이는 동시에 핵심역량을 향상시키고 주주중심경영으로 체질을 개선해 시장의 신뢰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이회장은 2조8,000억원의 개인재산을 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경영 선언 10년 후인 2002년. 삼성은 완전히 면모를 일신했다. 10년 전에 비해 매출은 4배, 시가총액은 21배, 세전이익은 62배 늘어난 반면, 부채비율은 336%에서 68%로 순차입금은 12조8,000억원에서 2조6,000억원으로 줄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일류기업에 올랐지만 이회장의 개혁의지는 여전히 뜨거웠다. 2003년 ‘제2기 신경영’을 선포하며 또 다른 개혁엔진에 시동을 건 것이다. 이번 개혁의 화두는 ‘인재’였다. ‘21세기는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로 규정하고 전사적인 인재발굴 프로젝트에 나선 것이다.

최근 이회장은 ‘존경받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재양성, 첨단기술 개발과 더불어 나눔과 상생의 경영을 더해 ‘글로벌 일류기업’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구상이 현실로 옮겨지고 있다.

약력 : 1942년 경남 의령 출생. 61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65년 일본 와세다대 졸업. 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수료. 66년 동양방송 입사. 68년 동양방송 이사. 78년 삼성물산 부회장. 8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87년 삼성그룹 회장. 96년 2002한ㆍ일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 96년 IOC 위원(현). 97년 삼성전자 회장(현) △수상: 9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2004 디자인 경영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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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