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대유와인 사장(50)에게 이번 연말연시는 어느 때보다 특별하다. 손꼽히는 와인수입판매사인 대유와인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뒤 처음 맞는 ‘와인의 계절’인 까닭에 각종 행사와 프로모션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몇 년 사이 ‘붐’이라 할 만큼 와인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와인의 진수를 전하는 전도사로, 마케터로, CEO로서 그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다.와인이 있는 자리 어디서나 이사장은 주인공 또는 호스트 역할을 하곤 한다. 24시간이 와인과 함께 흘러가지만 와인이 주제가 될 때는 표정마저 감미로워지는 어쩔 수 없는 마니아. “머리와 가슴을 만족시키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녹아 있는 특별한 음료”가 바로 이사장이 생각하는 와인의 정의다. 여느 술과는 확실히 다른, ‘또 하나의 문화’라는 이야기다.사실 이사장이 와인에 입문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지난 2000년 대유와인의 마케팅실장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으니 짧다면 짧다고 할 경력. 하지만 12년의 프랑스 생활을 통해 일상 속에서 와인과 친밀해진 ‘산 경험’을 갖고 있다. 게다가 서양사를 공부한 덕에 와인이 유럽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누구보다 잘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지식인들이 와인을 마시며 음악과 미술,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일군 것처럼 그도 파리 곳곳에서 와인의 마력을 체험했다. 그가 펼치는 ‘와인론’이 생생하고 재미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역사학도에서 와인회사 CEO로1982년 서강대 대학원에서 서양사 석사학위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공부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졸업 후 주저 없이 프랑스로 날아가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한국관광공사 파리사무소 홍보담당으로 일하며 마케팅을 체득하면서 인생항로가 바뀌었다.12년을 파리에서 지낸 후 귀국했을 때는, 한국과 프랑스의 교류 역할을 하고 싶다는 희망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때마침 마케팅매니저를 찾던 에어프랑스에 입사, 만 5년을 일했다. 하지만 21세기가 코앞에 다가오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상품, 마케팅 효과를 직접 측정할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한국회사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단 대기업에서 ‘부품’처럼 일하긴 싫었다.마치 예정돼 있던 것처럼, 대유와인과 인연이 닿았다. 유독 프랑스 브랜드가 많아 프랑스에 정통한 마케터를 찾던 대유와인과 이사장의 희망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파리 생활에서 접한 와인의 매력과 에어프랑스에서 와인마케팅을 직접 지휘한 경험 등이 그의 손을 내밀게 했다. 누구나 편한 직장, 익숙한 분야에서 일하길 바라기 마련이지만 이사장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셈이다.지난 2000년 대유와인 마케팅실장으로 와인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며 그의 선택을 걱정했다. 외환위기의 그늘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그때만 해도 와인은 그리 주목받는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 “와인을 제대로 공부해 보겠다”는 그에게 “술은 마시면 되지, 공부할 게 뭐 있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심지어 “술장사를 하려고 하느냐”며 질책하는 친구도 있었다. 와인의 대중화는 요원해 보였다.그러나 그로부터 4년이 지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햇포도주 ‘보졸레누보’ 열풍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거리 곳곳에 와인숍과 와인바가 들어서면서 시장이 쑥쑥 커지기 시작했다. 편의점,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는 서둘러 와인코너 만들기에 나섰다. 이사장은 “시장이 커가는 시점에 시류를 잘 잡아탔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사장의 마케팅 파워에 적잖은 공을 돌리고 있다. 와인아카데미를 열어 ‘공부하며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을 심었고 각종 강연을 통해 일반인 마니아를 숱하게 배출했다. 또 온ㆍ오프라인 와인숍을 통해 소매시장을 넓히는 등의 노력이 ‘와인 대중화’라는 큰 성과를 가져왔다.실제로 국내 와인시장은 지난 99년에 비해 세 배 가량 성장, 1,500만달러 수준이던 수입액이 4,600만달러선으로 늘었다. 그의 공로는 프랑스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지난 2003년 7월 세계 최대 와인전람회 비넥스포(Vinexpo)에서 프랑스 보르도지방의 와인협회가 주는 기사(騎士) 작위를 받은 것이다.2년에 한번 열리는 전람회에서도 가장 큰 행사인 와인 기사 작위 수여식은 전세계적으로 와인을 알리는 데 기여한 인물에게 기사의 명예를 주는 행사. 한국 여성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온몸으로 보람을 느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한복을 곱게 지어 입고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부인인 베르나데트 여사,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프랑스 여배우 카트린느 드뇌브 등 유명인사들과 와인잔을 나눈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일주일에 두세번 와인 즐겨요즘 이사장은 와인을 ‘공식 술’로 선택하는 송년ㆍ신년회가 크게 늘어난 것을 보면서 더없이 뿌듯한 마음이다. 여전히 폭탄주가 도는 모임이 적잖지만 연말연시 모임을 위해 대량주문을 하는 기업 또한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삼겹살에 와인을 곁들이는 모습도 낯설지 않게 돼 독한 술 위주의 음주문화가 부드럽고 감미롭게 바뀌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하기까지 하다고.특히 “가족들이 와인을 나누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는 그는 함께 모여 식사할 시간이 부족한 핵가족에게는 대화와 결속력을 돋워줘 ‘마법의 영약’이 따로 없다고 예찬했다. 또 “식탁에 와인을 올린다는 것은 즐겁고 풍부한 대화를 하자는 의미”라며 “감성적으로 충만한 느낌을 주는 술은 와인이 유일하다”고 덧붙였다. 와인을 즐기다 보면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 자연스레 종류와 역사, 특성을 공부하게 돼 지적 호기심까지 만족시킨다는 게 그의 지론. 와인을 일컬어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일주일에 두세 번 와인을 즐긴다는 이사장은 가장 바람직한 와인 향유법을 묻는 질문에 “음식과 와인을 천천히, 대화를 많이 하면서 즐기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답했다. 와인전문가의 답변치곤 ‘싱거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고급스러운 술이다’ ‘격식을 갖춰 마셔야 한다’ ‘좋은 음식과 곁들여야 한다’는 모든 고정관념은 깨도 좋습니다. 편의점에서 산 1만원짜리 와인이라도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면 수십배의 값어치를 하는 겁니다. 와인을 숭배할 필요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더욱이 와인 초보자라면 비싼 와인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이사장은 “와인도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 처음 접하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면서 “외국인이 김치맛을 제대로 알려면 많이 먹어보고 경험을 쌓아야 하듯, 와인도 자주 마실수록 감별력이 길러진다”고 말했다. 쉽게, 편하게, 풍성한 분위기와 대화를 위해 와인을 활용하면 누구나 와인 애호가가 된다는 것이다.“연말연시 분위기에는 프랑스의 와인명가 ‘바롱 필립 드 로칠드사’의 대표 브랜드 무통 카데(Mouton Cadet),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의 칠레 와인 에스쿠도 로호(Escudo Rojo)가 좋습니다. 3만원대여서 큰 부담도 없지요. 감미로운 와인 한병으로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보세요.”와인의 향처럼 부드럽지만 그 빛깔처럼 정열적인 이경희 사장이 권하는 연말연시 와인 팁이다.약력: 1955년생. 79년 서강대 사학과 졸업. 82년 서강대 사학과 대학원 졸업. 84년 파리 소르본대학 박사과정 수학. 86년 한국관광공사 파리지사 홍보담당. 94년 에어프랑스 한국지사 마케팅매니저. 2000년 (주)대유와인 마케팅실장. 2003년 Commanderie du Bontemps de Medoc et des Graves 기사 작위. 2004년 8월 (주)대유와인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