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가을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현 서울시장) 비서실에 여비서가 새로 왔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 중에 공채를 통해 입사한 새내기였다. 한국EMC에서 마케팅을 총괄하는 박재희 이사(39)는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만 해도 전화를 받고 임원 스케줄을 관리하는 여비서들의 가장 큰 성공모델은 사내방송 아나운서나 현대그룹이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말단 여비서는 15년 후 국내에서 손꼽히는 외국계 기업의 여성임원으로 우뚝 섰다. 그녀가 임원으로 있는 한국EMC는 세계 스토리지 시장에서 60%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 EMC의 국내법인이다.그녀가 입사 1년 만에 마케팅총괄 매니저가 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여성이 해외법인 마케팅매니저가 된 것은 EMC 사상 최초였기 때문이다. 당시 본사 홈페이지에 그녀의 승진인사가 빅뉴스로 떠올랐을 만큼 화제였다.그녀가 한국EMC에 과장으로 입사할 당시만 해도 EMC는 국내에서 회사 규모와 실적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그녀는 EMC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2000년 직지심체요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 벌인 ‘직지찾기’ 캠페인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EMC 본사는 문화마케팅의 성공모델이라며 극찬했다.스포츠 마케팅에서 보여준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98년 알피니스트 박영석 대장의 히말라야 등정 계획을 사전포착하고 마케팅 기회로 활용했다. 정상에 올랐을 때 카메라 앵글에 EMC 로고가 잡히도록 해 서울 도심 10여곳 옥외영상광고판에 하루 100회씩 무려 한달 동안이나 정상 정복장면이 노출됐다. 당시 광고업계에서는 “절반의 비용으로 10배의 광고효과를 냈다”고 평가했다.그녀의 섬세하고 치밀한 마케팅 전략은 축구마케팅에서도 빛을 발했다. 99년 한국ㆍ브라질전에서 한국팀 선수가 센터링을 하는 위치에 EMC 광고판을 설치해 노출효과를 극대화했다. 한국이 브라질을 처음 이긴 경기인 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런 마케팅으로 그녀는 5년 만에 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현재 한국EMC 본사에 근무하는 70여명의 여직원들에게 박이사는 가장 닮고 싶은 모델로 꼽힌다. “간혹 메일로 ‘어떻게 하면 이사님처럼 성공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여직원들도 있어요. 그럴 때면 불합리한 것에 무조건 저항하지도, 그렇다고 순응하지도 말고 재미있게 일하라고 말해요. 재미있어야 잘할 수 있다는 건 제 신앙과도 같습니다.”그녀는 신참 여비서 시절부터 남자들과 똑같이 능력으로 평가받아 언젠간 자신도 경영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비서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그녀는 경영진의 움직임과 조직 수뇌부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1년간의 비서생활을 마치고 들어간 외국계 기업도 그녀에게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슬기롭게 대처했다. 부장이 담배 심부름을 시키면 그녀는 담배를 한 보루나 사와 그 부장 앞에 내려놓으며 선물이라고 했다. 그러고 “이런 심부름을 안 시켰으면 좋겠다”고 공손하게 말했고 그후로는 담배 심부름을 하는 일이 없었다.그녀는 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못견디는 체질이다. 조직에서 인정도 받고 안정적으로 자리가 잡혔다 싶으면 그녀는 회사를 옮기거나 새로운 일을 찾았다. 래이켐에서 퀀텀으로 다시 델컴퓨터로 옮아다니며 새로운 도전을 했다. 한국EMC로 올 때 기대 이상의 낮은 직급이었는데도 그녀는 기꺼이 합류했다.EMC 해외법인 사상 최초의 여성임원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는 지금도 그녀의 도전은 지칠 줄 모른다. 아예 영업전선으로 나가 새로운 경험을 쌓겠다는 각오다. “기업용 스토리지뿐만 아니라 최근 소호 및 개인용 스토리지 시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이 분야에서 세일즈 매니저로 뛸 생각입니다.”약력 : 1965년 서울 출생. 87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87년 현대건설 입사. 92년 레이켐코리아. 96년 퀀텀코리아. 97년 델컴퓨터 한국법인. 97년 한국EMC 과장. 98년 한국EMC 마케팅총괄 매니저. 2002년 한국EMC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