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한국 정보통신(IT)산업의 역사에서 이용태 TG삼보컴퓨터 명예회장(71)의 공헌은 절대적이다. 국내 최초로 교통신호 전산화를 주도했고 공개 소프트웨어(SW)인 유닉스를 이용한 정부 행정망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으며 국내 최초로 PC를 개발, 생산하고 인터넷의 새로운 장을 연 초고속인터넷 두루넷을 설립한 것도 그였다. 그를 빼놓고 한국 IT산업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난센스에 다름 아니다.토인비식으로 표현하자면 이회장의 삶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도전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성공에 이른 과정이었다. 국내 최초의 PC생산도 그랬다.이회장이 PC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미국의 인텔사가 고밀도집적회로(LSI)를 내놓은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이회장은 LSI가 개발됐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이를 이용하면 우리나라도 마이크로컴퓨터, 즉 PC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LSI를 이용한 PC 제조를 산업화한 나라는 한 곳도 없어 일찍 시작하기만 하면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회장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핀잔만 들었을 뿐이었다.정부와 기업의 설득에 실패한 이회장의 선택은 결국 삼보컴퓨터 창업으로 이어졌다. 국내 유례가 없는 정보통신 벤처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80년의 일이었다. 마침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며 과학기술연구소의 대대적 조직개편도 있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벤처라는 생소한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자금과 인력확보 등 창업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전두환 정권이 연구소들을 통합하는 통에 많은 고급인재들이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역시 예상대로였다. PC개발은 어렵지 않았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지 1년 만인 81년 국내 최초의 PC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소량의 수출도 하는 등 삼보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86년에는 미국의 대표적 PC유통업체인 컴퓨터랜드에 제품을 대량 공급할 정도로 해외시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삼보에는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았다. 대기업과의 경쟁이 그것이었다.처음에 같이 PC사업을 하자는 제안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대기업들이 PC가 팔리기 시작하면서 앞다퉈 PC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경쟁이 붙었는데 문제는 대기업들의 저가공세였다. 처음부터 대기업들의 목적은 PC를 팔아 이익을 남기겠다는 것보다 앞으로 다가올 디지털시대에 대비해 노하우를 축적하는 데 있었으므로 적자구조를 불사한 것이다. 그 와중에 괴로운 건 삼보였다.“그때나 지금이나 중소기업이 힘들긴 마찬가집니다. 특히 은행문이 높아 자금난을 겪기 일쑤였죠. 은행원들로서도 대출에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하니 위험부담이 큰 중소기업을 피할 수밖에 없고요.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대출비율이나 대출조건 등을 명시하고 당분간 부작용이 나더라도 시장이 성숙할 때까지 의지를 갖고 정책을 집행해야 합니다.”큰 기대를 걸었던 컴퓨터랜드 납품도 얼마가지 못했다. 컴퓨터랜드의 최대 공급업체인 IBM이 삼보의 제품을 취급하는 한 제품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대기업의 등살에 설움을 당해야 했던 셈이다. 하지만 움츠리고 있기만 할 이회장이 아니었다. 98년 이회장은 회심의 카드를 선보여 세계 PC업계를 경악시켰다. 기존 제품에 비해 절반 가격의 제품인 ‘이머신즈’를 내놓은 것이다.이회장이 제품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던 것은 독특한 부품공급방식 덕이었다. 각 분야별 3위인 업체들의 제품만 사용해 부품원가를 대폭 낮춘 것이다. 선발업체들과 신제품 경쟁에서 밀리다 보니 생산라인 구축에 대한 투자비를 건지기도 전에 또다시 투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살림이 늘 빠듯하기 마련인 3위 업체를 모아 마진은 적더라도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완제품 가격을 500달러에 맞추고 부품 공급선을 구했습니다. 제품 사이클이 좀 지났더라도 컴퓨터를 돌리는 데 문제만 없으면 괜찮으니 싸게 넘기라고 부품업체들을 설득했죠. 처음에는 대개 부정적이었지만 100개 팔아 100만원 남기느니 1만개 팔아 1,000만원 남기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에 하나둘 설득되기 시작했습니다.”정부 무원칙이 두루넷 무너뜨려세계 최고라는 우리나라의 초고속인터넷 인프라는 이회장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 시기가 몇 년은 늦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96년 한국전력의 케이블 TV망을 이용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업체인 두루넷을 설립하고 이 땅에 초고속인터넷의 기반을 다진 이가 이회장이기 때문이다.PC사업에 매달리고 있던 이회장에게 통신사업을 제안한 것은 한국전력(한전)이었다. 한전의 유선케이블 TV망을 이용해 통신사업을 해보라는 것이었다.한전의 케이블망은 초고속인터넷에 안성맞춤이었다. 전화선에 비해 속도가 월등히 빠른데다 이미 수많은 가정에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회장의 뜻은 이번에도 반대에 부딪혔다. 초고속인터넷은 전용 광케이블망을 구축, 이용하거나 재래식 전화선을 개량한 ISDN 방식을 취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이회장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빌 게이츠가 “두루넷 덕에 한국은 미국보다 초고속인터넷 분야에서 10년은 앞설 수 있게 됐다”는 찬사를 하며 두루넷 사업에 참여했고 99년에는 미국 나스닥에 직상장할 정도로 국제적인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회장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전의 통신사업을 정부가 중단시키는 통에 선로증설을 위해 1조원 이상을 지출하는 등 투자비용이 급속히 늘어난 데 이어 한전이 통신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나스닥 주가가 폭락한 것이다. 2003년 두루넷은 결국 법정관리로 들어가고 말았다.“지금도 두루넷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듯이 괴롭습니다. 결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상도의에 어긋난 한전 탓에 두루넷은 물론이고 삼보컴퓨터마저 위기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하나로통신이 두루넷을 인수해 국내 초고속인터넷시장이 2강 구도로 재편됐지만 시장의 건전한 경쟁을 위해서는 역시 3강 체제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PC산업과 초고속인터넷산업에서 굵은 족적을 남긴 이회장이지만 돌이켜보면 후회가 없지 않다. 정보산업의 개념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70년대부터 정보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고 다녀 ‘정보산업의 전도사’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좀더 실속을 챙겼더라면’ 하는 회한이 있다는 것이다.“저는 참 싱거운 사람입니다. 정보산업을 전도한답시고 개인적으로 전혀 득이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왔으니까요.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법은 산업 전체에 공헌하는 것과 좋은 기업을 일궈 기여하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선택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합니다.”사실 이회장은 산업 전체를 위해 개인적인 이해를 포기한 일도 부지기수다. 특히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시절이 그랬다. 당시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상태였지만 이회장은 한국데이타통신의 대형사업에 삼보컴퓨터를 철저히 배제했다. 국가적인 사업에 불미스러운 잡음이 섞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사업을 추진할 때는 온갖 반대에 맞서는 억척을 부려 조기에 성과를 냈다. 정부 22개 부처의 전산망을 통합한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회장은 ‘선투자 후정산’이라는 정부조직에서는 선례가 없는 방식을 고집해 예산집행의 관례대로라면 18년이 걸릴 사업을 단 3년 만에 마쳤다.“전산망통합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유닉스라는 공개 소프트웨어를 전격 채용한 데 있습니다. 물론 반대가 많았죠. 안정적인 IBM 소프트에어가 있는데 왜 검증이 안된 유닉스를 쓰냐는 거였죠. 하지만 특정 회사의 제품에 기대기 시작하면 기술발전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결국 유닉스는 성공했고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낳았습니다. 다만 애써 닦아놓은 소프트웨어산업의 기반에도 불구하고 소프트웨어산업의 발전이 더딘 것이 아쉽죠. 결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없는 것 같아 실망스럽습니다.”이회장은 피 속에 ‘기업가 DNA’가 흐르고 있다고 할 만큼 한국인처럼 기업가 정신이 강한 민족도 없다고 말한다. 성취욕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것이다. 그만큼 강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벤처에 거는 희망도 남다르다. 제대로 육성하면 ‘선진국 입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그들의 실패를 용납하고 재기할 기회를 주는 성숙한 사회체제가 우선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약력 : 1933년생. 57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69년 미국 유타대 이학박사. 64년 이화여대 교수. 7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산기 국산화 연구실장. 78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80년 삼보컴퓨터 사장. 82년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87년 정보산업연합회 회장. 96년 두루넷 회장. 97년 한국전자거래진흥원 이사장. 98년 숙명학원 이사장. 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03년 TG삼보컴퓨터 명예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