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3일 오후 청와대에서 신용불량자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서민 경제난의 대표적 사례로 꼽혔던 신용불량자에 대한 해법이 다각도로 논의됐다. 논의의 내용과 생계형 신용불량자 신용회복 대책이 마음에 들었던지 노무현 대통령은 회의 중에 “이번 정책이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해서는 마지막 정책이다”고 말했다고 김영주 경제정책수석이 전했다. 불과 1년 전 중소기업 문제와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한 재정경제부의 보고를 받고 “도무지 정확한 실태가 조사되기나 했는가”라며 상당히 역정을 냈던 것과 비교되는 회의였다.신용불량자 문제의 대책을 모색한 이 회의와 관련, 관심을 끈 것은 회의가 열린 배경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앞서 한 건의 보고서 때문이라고 한다. 김영주 경제정책수석실에서 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노대통령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바로 ‘신용불량자 대책 추진현황과 평가ㆍ향후대책’이란 것이었고, 보고서를 유심히 본 노대통령은 바로 보고서 내용을 바탕으로 대책회의를 갖자고 했다는 후문이다.앞서 조윤제 전 경제보좌관(현 주영국대사) 때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시 조보좌관이 작성해 올린 200쪽 가량의 보고서를 두루 다 읽어보느라고 상당히 바빴다는 취지로 언급해 주변의 관심을 끈 적도 있다.청와대 관계자들은 ‘e지원’이라는 청와대 내부의 온라인 문서관리시스템이 구축돼 모든 결재문서ㆍ보고서 등이 모두 여기에 올라가고 이곳을 통해 처리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도 보고서 읽기를 좋아하는 노대통령의 스타일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개별 독대보고는 거의 없고, 대면보고 자체를 가급적 줄이되 꼭 필요할 경우 반드시 김우식 비서실장 등을 배석시켜 웬만한 국정운영 과정의 서류는 온라인 문서관리망에 올리라는 지시도 있었다. 국정원의 정보보고를 받아도 김실장을 배석시키는 등 주요보고, 특히 어떠한 결정을 수반하거나 방향설정이 뒤따를 수 있는 보고는 반드시 배석자를 두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보고서가 청와대 내부의 인트라넷에 올라가는 게 당연해지고 있다.수많은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가는데 이중 일부는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있는 ‘대통령 보고서’라는 코너가 공개 통로다. “좋은 보고서를 받으면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과감하게 업무내용을 공개해 공유하자”는 방침에 따른 것으로 일반인들도 물론 볼 수 있다.보고서가 특히 마음에 들 때 노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대외적인 공개를 지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 2월28일 경제보좌관실은 ‘투기성 외국자본 유입의 영향과 대응방향’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때는 별다른 안내 없이 슬며시 올려졌다. 홈페이지 방문자는 자연스럽게 보라는 식이다. 그러나 3월20일 공개된 노동비서관실의 ‘아일랜드의 사회적 협약 검토’ 보고서는 상당히 달랐다. 그냥 대통령 보고서 배너에 올려둔 것이 아니라 권재철 노동비서관에게 보고서 내용을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설명을 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설명회만으로도 모자라 3월21일부터 사흘간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에 내용을 자세하게 싣기도 했다.보고서를 본 뒤 노대통령의 반응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2004년 11월 문서관리시스템을 통한 보고가 시작된 이후 2005년 2월까지 넉 달이 채 안되는 기간에 온라인 보고문건은 958건이었다. 이중에는 밤에 관저에서 보고 다양한 의견서를 온라인에 올린 경우도 많아 오후 10시 이후에 본 것으로 기록된 문건만 252건이라는 게 윤태영 제1부속실장의 설명이다. 오전 6시 이전의 새벽에 본 문건도 이 기간 중 5건 있었다고 윤실장은 설명했다.내용이 좋으면 칭찬과 함께 바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회의가 열리지만 내용이 부적절하거나 함량이 떨어지면 그대로 질책이 떨어진다. ‘정책실장 선에서 적절히 주의바람’, ‘토론과 보고를 다시 합시다’고 온라인 결재란에 쓰면 상당히 직설적으로 꾸짖는 경우라고 한다. ‘부속실, 취지가 없는 문서까지 올리는 것은 좀 심하다. 다음부터는 취지를 요약할 것’, ‘이 한 건의 처리에 대통령의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 것인지를 판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열람하는 데만 30분’라는 식으로 쓴 것은 우회적이지만 신랄한 질책이라는 설명이다.지시와 결재, 의견제시까지 사이버공간에서 이뤄지자 참모들 중에는 속으로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다. 오랫동안 종이문서에 눈이 익어버린 경우도 있고, 작성자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명령계통에 있는 관계자 모두의 견해가 뚜렷이 남는데다 직급이 높다고 마구 밀어붙이기도 구조적으로 힘든 여건이기 때문이다. 또 이 같은 방식이 선호되는 바람에 “시스템과 토의가 왕성해지고 실질적 ‘행동’은 적은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도 청와대에서 신경이 쓰일 만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