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초동 1451-34.바로 이 번지수에는 5층 높이의 건물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건물 밖에는 1층 식당의 이름만이 붙어 있을 뿐 3ㆍ4ㆍ5층에는 간판 하나 붙어 있지 않다.과연 제대로 찾아온 것일까. 의아해하며 직원에게 전화를 하고 나서야 이곳에 바로 팬택앤큐리텔 디자인 산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서울 여의도 본사와 떨어져 있는 이곳은 보안을 위해 ‘일부러’ 간판을 달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휴대전화 디자인 도안 한 장만으로도 엄청난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 디자인실은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물론 출입문에도 보완장치가 완벽하게 설치돼 있다. 출입문은 오로지 디자인실 직원의 출입증만으로 열 수 있다. 여의도에 위치한 본사 임원의 출입증으로도 문은 열리지 않을 정도다.직원의 안내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밖과는 확연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넥타이 맨 양복신사는 손에 꼽혔고, 대다수의 디자이너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외모를 자랑했다. 형형색색 저마다의 패션을 입은 디자이너들은 헤어스타일 또한 다양했다.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린 스킨헤드부터 어깨까지 기른 장발까지 길에서 마주치면 한번쯤 뒤돌아볼 만한 디자이너도 적지 않았다.튀는 것은 외모만이 아니었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에는 여러 승용차 가운데 3대의 오토바이가 보란 듯이 주차돼 있다. 모두 디자인실 디자이너들의 ‘애마’로 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로 출퇴근한다.벽면 곳곳에 붙어 있는 휴대전화 디자인 도안과 완제품을 구경하다 보면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있다. 바로 디자이너들의 책상이다. 자신이 수집하는 프라모델을 책상에 진열한 사람, 화초를 놓은 사람 등 다양하기만 하다. 심지어 책상에 어항을 놓고 열대어를 애지중지 키우는 디자이너도 보인다.디자인실의 실장인 동시에 디자인 부문의 유일한 임원인 김승찬 팬택앤큐리텔 상무보는 “창의력이 디자인의 핵심”이라며 “사고의 틀을 열어두기 위해 본사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말했다. 김상무보는 이어 “복장과 분위기가 자유로운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김상무보는 산업디자인 경력 20년을 자랑하며 2000년부터 디자인실 수장으로 있다. 휴대전화 디자인을 총괄해 온 김상무보는 “팬택앤큐리텔의 디자인 인력은 모두 90여명이다”며 “2000년 13명인 것과 비교해보면 회사의 빠른 발전 속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이곳의 디자이너들의 평균연령은 30대 초중반. 휴대전화 경쟁사 디자인 인력에 비해 젊은 편이다. 이런 이유로 경쟁사에 비해 팬택앤큐리텔의 휴대전화는 ‘톡톡 튀고’ ‘활기찬’ 디자인을 선보인다는 설명이다.디자인실은 크게 3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국내디자인팀과 해외디자인팀, 선행디자인팀으로 나뉘어 제품에 자신의 아이디어와 감성을 담아낸다. 국내디자인과 해외디자인팀은 말 그대로 각각 내수용과 수출용 휴대전화 디자인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선행디자인팀은 디자인의 미래를 맡는다. 김상무보는 “디자인이 나아갈 로드맵을 짜는 게 선행디자인팀의 역할”이라며 “디자인 트렌드를 분석하며 앞으로 나와야 할 디자인을 연구하는 팀이다”고 설명했다. ‘아이디어뱅크’ 역할의 팀이라는 얘기다.3개팀에 속한 디자이너들의 업무는 또다시 5가지로 나뉜다. 대다수가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은 스타일링과 색상ㆍ소재, UIㆍGI, 패키징, 플래닝 이렇게 세분화된 업무를 적성과 성향에 따라 맡는다.스타일링은 ‘디자인’ 하면 떠오르는 외형디자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색상ㆍ소재를 다루는 인력은 전원 여성으로 구성돼 트렌드와 감성을 섬세하게 잡아낸다. UI(User Interface), GI(Graphic User Interface)를 연구하는 디자이너는 이용자가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심한다. 휴대전화와 이용자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휴대전화의 평균 세로폭은 85mm, 가로폭은 45mm, 두께는 22mm라고 한다. 이중에서도 이용자가 손으로 버튼을 누르는 실사용 공간은 세로 30mm, 가로 20mm으로 아주 작다. 단순히 멋있는 디자인만이 아닌 이용자가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UI, GI 인력이 담당하는 것이다.플래닝은 한마디로 디자인실의 총체적인 ‘기획’ 부문이다. 선행디자인팀에서 플래닝을 담당하는 김영동 연구원은 “어떤 디자인의 제품이 소비자의 눈길을 끌지 리서치하며 아이디어를 모은다”고 말했다.이렇게 ‘따로 또 같이’ 움직이는 팬택앤큐리텔 디자이너들은 휴대전화 한 제품을 평균 45일 동안 디자인한다. 시장동향을 파악하며 리서치하고 스케치해내는 데 15일, 나머지 30일간은 구체적인 외향과 색상, 소재 등을 만들어낸다.팬택앤큐리텔 디자인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국내 최강의 ‘디자인 맨파워’ 군단으로 자리잡았다. 단지 소비자한테 사랑받아서만이 아니다. 각국이 인정하는 국제 ‘디자인 어워드’에서 각종 상을 받으며 ‘디자인 코리아’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줬다.통상적으로 권위 있는 글로벌 3대 디자인 어워드로 아이에프(iF)와 IDEA, 레드닷(Reddot)이 꼽힌다. 이중 독일이 주최하는 아이에프와 레드닷의 2005년 어워드에서 팬택앤큐리텔 디자이너 3명이 상을 받았다. 팬택앤큐리텔 디자이너들은 이 같은 국제디자인상을 받기 전에 이미 국내 디자인상을 섭렵했다. 한국산업디자인 대상과 굿디자인 산업자원부장관상 등을 받은 연구원은 적지 않다.‘아이디어’가 생명인 디자이너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영감을 받을까. 답은 ‘하루 종일, 어디서든지’였다. 잘 때도 꿈속에서 디자인이 나온다는 연구원도 있었고, 술 마실 때도 디자인을 생각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디자인실에 앉아 있기만 한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김성재 국내디자인팀장은 “책상 앞에서의 책과 잡지, 인터넷 등만으로는 발상에 한계가 있다”며 “삼삼오오씩 밖으로 내보내 백화점을 돌게 하거나 영화를 보도록 할 때도 있다”고 밝혔다.팬택앤큐리텔의 과감하고 젊은 디자인은 달리 나온 게 아니었다. 진보적인 분위기를 만든 디자인실 임원과 팀장, 이에 부합하는 디자이너들의 신선한 머리가 원동력인 셈이다.INTERVIEW 스타 연구원사람 만날 때 ‘휴대전화’부터 봐노화준 전임연구원(33·사진 가운데)과 김경윤 연구원(30·오른쪽)은 글로벌 디자인어워드 아이에프와 레드닷 모두에 이름을 올렸고, 전세민 전임연구원(31)은 레드닷에서 상을 받으며 명성을 떨쳤다.디카폰 ‘P1’과 목걸이형 MP3폰 ‘PH-S4000’을 디자인한 노화준 전임연구원은 “자동차와 MP3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등 다른 기기를 보면서도 디자인을 생각한다”며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을 보며 아이디어를 구상해낸다”고 말했다. 이들은 취미도 각기 다양하고 개성이 넘친다. 미니카 수집 마니아인 노연구원은 세계 각국에서 300여개의 미니카를 모았다. 310만 화소 디카폰 ‘PH-K1000V’의 주인공 전세민 전임연구원(31)은 디자인실에서도 알아주는 독특한 취미를 지녔다. 사무실 책상에 수족관을 놓고 열대어를 키운다. 캠코더폰 ‘PH-L4000V’를 만든 김경윤 연구원(30)은 게임과 프라모델을 즐긴다. 김연구원은 “내 마음에 드는 만족할 만한 디자인을 내는 게 목표”라고 힘줘 말했다.이들이 1인당 1년에 디자인해내는 휴대전화는 4~5개. 사람을 처음 볼 때 가장 처음 보는 게 바로 휴대전화. 길을 가다가 자신이 디자인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반갑고 보람이 절로 느껴진다. ‘누구나 좋아 할 디자인, 사람들이 즐거워할 디자인’을 내놓기 위해 이들은 오늘도 밤잠을 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