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자제’.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은 나를 저렇게 불렀다. 아버지가 나를 쉰에 나았기 때문에 ‘쉰둥이’라고 부른 어른들도 있었다. 어릴 적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적지 않은 콤플렉스였다. 내 친구들의 부모는 우리 부모에 견주어 젊디젊었다. 게다가 우리 부모는 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란민, 실향민이어서 일가친척이 거의 없었다. 친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외가 쪽 피붙이도 전혀 없었다. 친구들이 자기 할아버지나 삼촌, 이모를 부를 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1909년생이고, 나는 1959년에 태어났다. 1989년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는 20세기를 고스란히 관통하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전근대의 끝에서 식민지를 거쳐,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 시기를 통과해 20세기 말엽에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너무 많은 시대’를 살다 가셨다. 아버지는 평생 농부였지만, 농부였다고 해서 저 시대와의 불화로부터 멀었던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아버지에게 근대는 거의 주입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옷만 해도 그렇다. 아버지는 평생 한복을 고집했다. 양복이 아예 없었다. 아버지의 옷에서 근대는 중절모와 구두까지만이었다. 몇 해 전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아버지를 생각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 과연 ‘나’라는 것이 있었을까. 사회적 자아는 있었을지언정, 개인적 자아는 거의 없었을 것 같았다. 저 프로이트가 말하는, 서구 사회학과 심리학이 말하는 ‘주체’는 없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전자는 전적으로 조선왕조의 유전자였다. 농경 공동체 문화, 가부장적 문화, 남성 중심적 문화를 그대로 전수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지막 아버지였다. 물려받은 대로, 물려줄 수 있었던 마지막 아버지.그러고 보니 나는 마지막 아들이자, 최초의 아버지였다. 나는 마지막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은 마지막 아들이었지만, 물려받은 것을 내 아들딸에게 물려줄 수 없는 최초의 아버지였다. 이 사태는 매우 분열증적이다. 아버지는 족보로부터 시작해 관혼상제 일체를 고스란히 내게 전수했지만,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차례와 제사가 아파트로 들어가고, 돌잔치나 결혼식, 이제는 장례식까지 ‘서비스 업체’에서 도맡는다. 특히 아버지의 권위. 내게는 아버지가 누렸던 권위가 전혀 없다. 나는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좀스러운 남편이고, 아들딸의 핀잔 앞에서 속수무책인 허약한 가장이다.한때 좋은 아버지가 되자는 캠페인이 벌어진 적이 있다. 저와 같은 캠페인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최초의 아버지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역할모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근대화 프로젝트는 눈부셨지만, 그리하여 가족을 해체하고, 나고 자란 농촌을 버리고 모두들 거대도시로 빨려 들어갔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은 그 새로움에 적응할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딸은 아들딸대로 ‘황무지’에 놓여졌다. 산업사회와 가족 사이에는 엄연한 시차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차를 좁히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전무했다. 국가가 주도한 근대화는 국민들을 모두 도시로 끌어들여 놓고는 방치했다.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다. 가족 구성원은 ‘산업전사’일 따름이었다.3년이 지나면, 아버지가 나를 낳은 나이가 된다. 쉰. 그때 나는 또 한 번 아버지를 놓고 심하게 앓을 것이다. 나이 쉰에 나를 낳아놓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뒤늦게 둘째아이를 낳았을 때,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분만실 앞에서 나는 손을 꼽고 있었다. 둘째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러니까 앞으로 25년을 더 벌어야 하는구나, 60대 중반까지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하는구나라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푸른빛을 띠던 아버지 손등의 힘줄이 눈에 선하다. 늘 수염에 가려져 있던 입술 왼쪽의 작은 혹도 떠오른다. 큰 코에 유난히 깊고 그윽했던 눈매며, 지포 라이터에서 나던 휘발유 냄새도 또렷하다. 두 아이는 나에게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나는 두 아이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물려받았지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는 최초의 아버지는 고단하고 외롭다.글/ 이문재시인. 시사저널 취재부장(현). △저서: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등. △수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