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글로벌화의 가능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내수시장이 좁고 부존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한국기업에는 더욱 그러하다. 동시에 이 말이 갖는 맥락과 역사적 결과를 찬찬히 살펴보면 충분한 준비 없는 글로벌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깨닫게 된다.글로벌화를 통해 더 넓은 시장을 공략하고 더 풍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지만 더 많은 변수, 더 높은 변화의 파고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선진기업들을 봐도 이런 모습은 잘 나타난다. 글로벌화에 일찍 눈뜨거나 좀더 적극적인 기업들은 내수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 기업보다는 그렇지 못한 기업인 경우가 많았다. 새롭게 열린 기회를 보고 적극적으로 글로벌화를 추진했다기보다 내수시장에서 열세였던 기업들이 새로운 경쟁구도 반전의 기회로 글로벌화를 추진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미국의 자동차업체 중 글로벌화를 먼저 추진하고 해외생산 비중이 높은 기업은 2위 업체인 포드다. 미국시장에서 GM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글로벌화에 먼저 눈을 돌린 것이다. 일본 자동차산업에서도 내수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한 도요타보다는 열등적 지위에 있던 닛산이나 혼다가 훨씬 먼저 미국에 생산설비를 마련하고 역량을 집중했다.전자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소니를 일본 전자산업 최고의 브랜드로 생각하지만 전통적인 일본 최고의 전자기업은 마쓰시타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쓰시타는 매출액 면에서 3조엔 이상 소니를 앞서는 일본 최고의 전자기업이었다. 마쓰시타가 확보하고 있는 내수시장 유통망을 극복하지 못할 바에야 해외시장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 소니의 생각이었고, 이러한 전략은 멋지게 맞아떨어졌다.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세계는 우루과이라운드 등으로 국가간의 장벽이 낮아지고 자유무역 물결이 거세게 일어난다. 교통ㆍ통신기술의 발달도 더욱 활발한 글로벌화를 가능케 했다. 글로벌화는 필요하면 추진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한국, 일본 같은 아시아 기업들은 미국으로부터 내수시장 개방 압력을 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내수시장을 지켜주던 장벽이 사라지고 해외기업이 진입해 오는 상황에서 내수시장을 지키기만 하는 전략은 잃을 것밖에 없는 외통수로 자신을 몰아넣는 것이었다.사실 우루과이라운드 등으로 세계화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90년대 초반 많은 전문가들이 내수시장의 장벽이 사라지면 대부분의 한국기업들은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수입이 금지돼 있던 일본 전자제품과 자동차의 본격 진입은 한국업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것이란 지적도 있었다. 이는 원천기술도 부족하고 브랜드에서도 밀리는 한국기업이 세계적인 기업과의 직접경쟁에서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겠냐는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전망이었다.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만 보면 그러한 논의는 지나친 비관론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개방과 경쟁이 한국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글로벌화에 나서는 계기가 됐고, 글로벌 기업으로 변신하는 보약이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논의들이 편안하게 보호받는 안방시장에서 경쟁하던 한국기업들의 위기감을 정확히 나타내주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한편 글로벌화라는 시대적 요구를 등에 업고 내수시장에서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업체들이 해외시장에서 이룩한 성공을 기반으로 다시 내수시장에서 성공하는 사례는 글로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내수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에 안주하고 있던 기업들도 글로벌화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실제로 해외에서 성공한 브랜드로 자리잡은 소니가 일본 내수시장에서도 마쓰시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일본 내수시장 유통망과 소비자선호도 등 제반 여건이 불리한데도 해외시장에서 단련된 제품력과 기민한 마케팅 기법을 바탕으로 일본 소비자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다. 정보의 유통속도가 빨라지면서 해외시장의 성공 여부가 언론에 바로 전해지고, 국내시장의 소비자 인식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글로벌화에 소극적이던 도요타도 80년대 후반부터 미국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렉서스라는 브랜드를 바탕으로 미국시장에서 자사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결과 현재 도요타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3분의 2가 미국시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향후 2~3년이 지나면 미국에서의 생산량이 일본을 앞지르게 될 전망이라고 한다.문제는 글로벌화가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 특정 국가에 적합한 기업문화만으로 글로벌 기업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됐다는 점이다. 도요타의 경우 미국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미국시장에서 1위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GM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도요타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생산량과 이익의 대부분을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이면서 도요타 기업문화를 다시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전통적으로 도요타의 기업문화는 시골사람의 우직함으로 표현된다. 아이치현이라는 중소도시 태생인 도요타는 지방대생들이 많고 단결력이 강해 최고 명문인 도쿄대 출신들이 임원진을 휩쓸고 있는 닛산과 곧잘 비교되곤 한다. 출발시점이 비슷하고 동일한 산업에서 경쟁을 했지만 닛산은 외국기업에 팔리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것과 달리 도요타는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두 기업의 명암을 갈랐던 요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도요타 특유의 우직한 기업문화에 있다고 경영학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이는 도요타의 최대 강점인 도요타적 생산방식(TPS)을 세계 모든 기업들이 배워갈 수 있도록 공장을 개방하고 기법을 가르쳐줘도 생산성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은 기업문화를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사상 최대 순익을 내도 임금인상을 요구하지 않는 노조, 도요타는 자신만이 다닐 기업이 아니라 자신의 자식도 다닐 기업으로 생각하는 근로자들의 주인의식, 장기적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소유경영과 전문경영이 조화된 지배구조는 다른 기업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별화 요인인 것이다.따라서 글로벌화 초기에 도요타는 자사의 강점을 해외에 이식하기 위해 현지문화에 적응하기보다 ‘도요타 웨이’(Toyota Way) 이식에 힘을 쏟았다. TPS 없는 도요타는 의미가 없고 도요타적 문화 없는 TPS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 후지오 도요타 사장이 미국 현지공장에 가서 제일 먼저 힘을 쏟은 것은 TPS 핵심인 ‘카이젠’(개선)이 결코 이의 영어적 표현인 ‘임프루브먼트’(Improvement)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변화를 줘 성과개선을 유도하는 임프루브먼트가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혁신해 반드시 성공시키는 ‘카이젠’ 정신이 정착되지 못하면 도요타 미국공장은 미국의 한 공장일 뿐 결코 도요타의 공장이 될 수 없다고 믿은 것이었다.이러한 도요타도 최근 글로벌 관점에서 기업문화를 재정립해야 하는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시장에서 시장점유율과 매출이 증가하고 있지만, 미국 현지공장은 노동력 부족과 생산성 향상의 정체 현상이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근로자들과 달리 미국 근로자들은 숙련도가 한창 높아지는 8~10년차가 되면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경쟁업체로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한다. 이러한 이직은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른 인력부족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상 최대 순이익을 올려도 임금인상 요구를 하지 않는 근로자들과 일해 오던 일본 경영진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중장기적으로 해외생산 비중을 높일 계획을 갖고 있는 도요타로서는 차제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 있다. 재고가 없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현장근로자가 라인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도요타적 생산시스템에서 인력부족, 특히 숙련공의 공백은 그 무엇보다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실제로 최근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사례가 해외에서 연달아 발생하면서 이러한 위기의식이 단지 기우만은 아니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한국기업은 유례없는 글로벌화의 성공사례다. 그러나 도요타의 경험에서 보듯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문제는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준의 것은 아니다. 기업의 정신적ㆍ문화적 자본이 풍부할 때 돌파가 가능한 문제들이다. 한국기업의 경영수준이 한 단계 향상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