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제 500호 (2005년 07월 04일)

‘바이 아메리카’ 돌풍 본격 스타트

기사입력 2006.09.04 오후 12:00

“일본에 이어 중국의 사냥꾼들이 몰려온다.”

요즘 미국 언론들은 ‘황색 바람’에 대한 경계경보를 계속 울리고 있다. 전세계 원자재를 무서운 기세로 빨아들이면서 원유ㆍ철강ㆍ구리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던 중국이 이번에는 미국기업들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지난 6월20일에는 중국 최대 가전업체인 하이얼이 100년 전통의 미국 가전업체 메이택에 인수제안서를 공식 제출했고, 이틀 후에는 중국 공기업인 중국해양석유가 185억달러짜리 대형 인수제안서를 미국 석유회사 우노칼측에 보냈다. 냉장고로 유명한 미국 3위 가전회사 메이택은 1999년 미국시장에 진출한 하이얼의 저가제품 등에 이미 시장을 잠식당해 지난해 900만달러의 적자를 내고 매물로 나온 상태다.

특히 하이얼과 중국해양석유가 인수하겠다는 미국기업들은 이미 다른 업체에 지분을 넘기기로 절반쯤 합의해 놓은 상태여서 중국기업들의 공격성을 실감케 하고 있다. 우노칼은 미국 국적의 세계 2위 석유회사 셰브론텍사코와 200억달러에 지분을 넘기기로 합의했고 메이택은 지난 5월 투자 컨소시엄인 리플우드와 인수협상을 마쳤다.

중국업체들은 뒤늦게 끼어든 만큼 앞선 인수희망자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불러 차이나달러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하이얼이 부른 메이택의 몸값은 12억8,000만달러로 리플우드보다 14% 높고 중국해양석유의 인수제안가도 경쟁사인 셰브론이 제시한 가격 164억달러를 압도하는 것이다.

현지언론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이미 자국의 부동산, 골프장, 영화스튜디오들이 일본인들에게 무차별 인수당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차이나달러가 당시 상황을 재현할 것이라며 적잖은 위협감을 느끼고 있다. 2차대전 패전 후 미국에 대해 열등감을 쌓아왔던 일본인들은 80년대 고속성장에 따라 자신감이 붙고 자금 여력도 생기자 소니가 컬럼비아픽처스를, 미쓰비시부동산이 뉴욕의 록펠러센터를 사들이는 등 미국의 상징적인 자산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자존심이 상처를 입고 밀물처럼 들어오는 일본 자본에 대한 공포감이 더해져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다.

미국, 위협감 느끼기 시작

미국에서는 이미 중국기업의 ‘바이 아메리카’에 대한 견제가 시작됐다. 특히 올 초 IBM PC사업을 공식 인수한 중국 롄샹은 미국의 PC메이커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델의 한 직원이 지난 4월 말 고객에게 “IBM PC제품 1달러를 사면 중국 정부에 1달러를 주는 꼴”이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고, 휴렛팩커드는 올 초 대만에서 롄샹(聯想)의 기업이름을 동음이의어로 활용해 이 회사의 IBM PC 인수를 비웃는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네’(連想,想都不要想)라는 광고를 내보내 소비자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중국기업 입장에서 진짜 문제는 외국에서 겪어야 하는 마음고생이 아니라 차이나달러에 대한 이런 공포, 또는 거부감이 자사를 실제로 무너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롄샹에 인수된 IBM PC의 경우 단골고객이던 GE가 “앞으로는 델과 거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미 국방부와 에너지부는 휴렛팩커드로 거래처를 바꿨다. IBM PC의 아시아ㆍ태평양지역 점유율은 지난해 2분기 18%에서 올해 1분기 13%로 추락했다.

차이나달러에 대한 반감은 어쩌면 기우일지도 모른다. 자신감만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산 없이 급조되는 해외진출이 화를 불러온다는 것은 이미 80년대 일본기업과 90년대 한국기업들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삼성, LG, 대우, 현대그룹이 97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미국에서 경쟁적으로 사들인 기업들 중 현재 영업망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해외시장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전제되지 않았고, 외국기업의 조직문화를 읽지 못했으며, 점령군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는 현지인들의 마음을 내 편으로 돌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글로벌 경영의 노하우가 없었던 셈이다.

기업들의 성급한 해외진출에 대한 문제의식은 중국 내에도 존재한다. 후줘하오 칭화대 경영학 교수는 최근 언론을 통해 “중국기업들이 해외에서 인수하는 회사들은 고질적인 문제들이 누적돼 재무상태가 악화일로에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현지 경영자들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중국인들이 가서 고치기에는 경험이 너무 일천하다”고 따끔하게 충고 했다.

지난해 중국 전자회사 TCL과 휴대전화 합작사를 만들었던 프랑스 통신장비회사 알카텔이 최근 합작 9개월 만에 적자누적을 이유로 합작을 철회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서투른 해외진출에는 분명히 부작용이 따른다. 당초 TCL은 2년 내에 알카텔의 휴대전화사업을 인수한다는 복안을 갖고 합작사를 만들었으나 이는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불과했다. 알카텔은 합작사가 지난해 2억5,800만홍콩달러(약 333억원)의 적자를 내자마자 투자원금의 20%도 안되는 6,334만홍콩달러(약 82억원)만 받고 서둘러 지분 45%를 처분했다. TCL이 프랑스 톰슨의 TV브라운관 사업을 사실상 인수해 만든 합작사 TCL톰슨일렉트로닉스도 지난해 6,200만홍콩달러(약 8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중국 둥팡전자가 하이닉스 LCD사업을 인수해 출범시킨 BOE하이디스테크놀로지도 지난해 매출이 7,113억원을 기록해 2003년보다 13% 줄었고 순익도 774억원에서 116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브레이크 없는 해외 진출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적극 밀어주고 있어 차이나달러의 해외투자, 특히 미국행은 앞으로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중국 상무부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중국기업들은 2003∼2004년에 총 55억달러를 투자해 해외에 1,339개 법인을 만들었다.

지난해 말 현재 중국 해외법인수는 8,200개이며, 이 중 6분의 1이 지난 2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에너지자원 확보라는 중국의 국가정책과 맞물려 지난해 민간부문의 해외투자액 중 53%가 광산과 유전 등에 집중 투입됐다. 공기업 중국해양석유의 미국 우노칼 인수도 이 같은 정책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해 3월 전국인민대표회의(의회)에서 “모든 기업들은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해외기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해 정부가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직접적으로 지휘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80년대 미국을 종횡무진했던 ‘재팬달러컬럼비아픽처스’보다 ‘황색 바람’이 더 강풍이 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에다 대기업 인수합병을 중개하고 거액의 수수료를 벌고 싶어 하는 미 투자은행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더해져 과거 일본 및 한국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하고 싶은 중국기업들의 해외진출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선진국 유통망, 브랜드,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중국기업의 욕심, 정부의 독려, 미국 뱅커들의 야심이 ‘차이나 광풍’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국업체의 미국기업 인수과정에서 미 뱅커들이 하는 역할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크다. 하이얼은 메이택 인수를 혼자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모펀드 블랙스톤 및 베인앤드캐피털과 손잡고 컨소시엄을 만들었고 중국해양석유의 우노칼 인수에는 미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및 JP모건이 자문업체로 참여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해양석유의 우노칼 인수가 성사될 경우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은 수수료로 무려 2억달러를 챙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통신은 메릴린치 보고서를 인용, 지난해 중국기업의 해외기업 인수 및 증시상장을 돕고 미국ㆍ유럽 투자은행들이 번 돈은 40억달러였으며 이 액수가 2010년이면 120억달러까지 불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중국에 잇따라 진출한 미 투자은행들은 중국증시가 6년째 침체를 못 벗어나고 기업공개(IPO)가 줄줄이 연기되면서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없어진 터라 중국기업과 미국기업 사이를 오가며 더욱 적극적으로 중매쟁이 역할을 자처할 가능성이 크다.

영국은행 HSBC는 “기업 인수합병 중개서비스는 앞으로 수년 동안 중국에 진출한 해외투자은행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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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6-09-04 1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