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報恩) 혹은 ‘신세 갚기’. 동서와 고금을 망라해 인간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주요 덕목이다.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배은망덕하다’는 평을 듣게 되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 경제적 거래에서 신용, 정치적 관계에서 신의 등이 이런 것에 연결된다.대통령의 보은, 대통령의 신세 갚기는 어떻게 될까. 일반인과 차이점은 무엇이며 공과 사 구별은 어떻게 돼야 하나. 임기 반환점에 선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정책과 관련, 일반이 갖는 관심의 한 축은 이런 요소다. 은혜를 갚아가는 순서와 보상의 크기는 신세진 정도에 비례할까. 다만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일까, 갚는 방식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보인다.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 단순 공헌도만 보면 ‘좌광재, 우희정’으로 상징됐던 일부 386참모들의 기여가 컸을 것 같다. 집권하기까지 이광재, 안희정씨에 대한 노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길은 많이 달랐다. 이씨가 대통령직 인수위 기획팀장을 거쳐 청와대 핵심요직의 비서관을 택해 최측근으로 남았다가 국회로 진출한 것과 달리 안씨는 아직 외곽을 돌고 있다. 특히 이씨는 국정상황실이라는, 참여정부의 청와대에서 비서관급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일도 많은 조직을 맡아 집권 초반에 노대통령의 지근거리에 머무를 수 있었다.반면 인수위 정무팀장을 거친 안씨는 2002년 대선과정에서 정치자금을 만진 탓에 사법처리까지 받게 됐다. 두 사람은 양대 참모였지만 선거자금에 깊이 관여한 안씨에게 현실적으로 비중이 더 쏠렸다는 게 당시 주변 인사들의 평가다. 그런 그가 대선승리 후 공개적으로 일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됐으니 노대통령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그래서 노대통령은 앞서 전국에 생방송되는 ‘국민과의 대화’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안씨를 염두에 두고 “나의 동업자”라고 했다. 과거 관습의 강을 건너오다가 불가피하게 대통령인 나 대신 벌을 받는 내 동업자라는 얘기였다. 한 참모는 “대통령이 국민을 대상으로 TV연설에서 한 동지, 동업자라는 말만으로도 신세를 갚은 것 아니겠느냐”고도 해석했다.후원회장을 지낸 이기명씨도 안씨와 비슷한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이씨도 노대통령 취임이후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더불어 몇몇 경제적 거래에 대한 구설에 오르면서 난관에 처한 적 있다. 노대통령은 그에게 ‘선생님’이라며 시종일관 깍듯한 표현으로 e메일 편지를 썼고 이를 전국민이 보도록 공개했다. 자신을 거들다 일부 언론의 포화를 받고 곤경에 처한 전 후원회장에게 보낸 위로와 진사의 서신은 구애편지 수준만큼이나 정중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런 형식을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신세를 나름대로 갚은 것으로 해석된다.안씨는 대선자금 문제로 사법처리를 받아 중용이 쉽지 않고, 이 전 후원회장도 연령 등으로 특정한 자리를 맡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천금과도 같은 대통령의 말과 대통령의 인사로 보은한 셈이다. 다만 강회장은 대그룹 CEO들이 대거 들어간 2005년 석탄일기념 경제인 특별사면에 포함됐다.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없게 된 점도 노대통령의 운신을 좁게 만들었다. 2004년 총선 전 청와대 참모 중 몇몇이 총선출마를 위해 사표를 냈다. 당시 출마 인사차 방문한 서갑원ㆍ김현미ㆍ정만호ㆍ권선택 비서관, 백원우 행정관 등 참모들에게 노대통령은 녹차 한 잔 주고 개인별로 한 명씩 다정하게 사진을 찍어주는 것 외에 해준 게 없었다. 한 참모는 “옛날 같으면 출마자에게 봉투 하나쯤을 쥐여줬겠지만 사진 한 장으로 측근임을 알아서 선전하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취지 아니냐”고 해석했다.정치권 인사로 보면 부산상고 선배이기도 한 신상우씨나 이재정씨 같은 경우는 민주평통회의 부의장직을 맡겨 과거를 잊지 않았고, 역시 노대통령 만들기에 기여했다가 철창에 갇힌 정대철씨의 경우 아들을 비서실 행정관으로 채용, 정치 입문을 돕기도 했다.보은과 기용 사이의 구별이 애매한 경우도 많다. 김두관 전 남해군수는 1차로 행자부 장관에 기용했고 총선 낙선 뒤에도 2차로 정치특보라는 명함을 주면서 거듭 챙겼다. 이정우ㆍ윤성식ㆍ성경륭 위원장, 권기홍ㆍ윤덕홍 교수 등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도움을 준 지지 학자들에게는 대개 장관이나 국정자문위원장 등을 맡겨 기회를 줬다.노대통령은 이철ㆍ이해성ㆍ한이헌씨 등 총선에 ‘징발’했던 낙선자들을 공기업 사장으로, 또 다른 총선출마자는 장관으로 기용하면서 일부 비판을 받았다. 이 인사와 관련, 문제가 없다는 청와대측의 설명은 간곡하고 해명도 절실하지만 이를 보는 많은 국민들의 시각은 달랐다. 정치권에 끌어들여 낙선자가 된 지지자를 청와대 비서진으로 데려 쓴 경우에는 별로 뒷말이 없었지만 공기업 사장이나 장관처럼 정치권 밖 자리가 되자 민심은 냉정하게 달리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