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최수연씨(31)는 퇴직연금이 올 12월1일부터 시행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씨는 한 동료에게 “퇴직연금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동료는 대뜸 놀란 채 목소리를 낮추며 “퇴직하려고 사표 썼느냐”고 되물었다.지난 8월9일 국무회의를 통해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이 확정됐다. 시행령에는 12월부터 선보이는 퇴직연금제의 구체적인 방안이 담겼다. 사실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은 이미 지난해 12월28일 국회에서 통과돼 지난 1월27일 공포됐다.하지만 이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에 담긴 퇴직연금은 아직까지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다. 앞서 언급한 최씨의 동료 에피소드처럼 ‘퇴직’ 얘기만 꺼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직장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퇴직연금이 시행되면 퇴직금제도는 없어지는 것이냐’, ‘퇴직연금이 뭔지도 모르는데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하느냐’ 등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기본적인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퇴직연금제도’가 실시된다고 도입까지 의무화되는 건 결코 아니다. 5인 이상 사업장에서 의무사항은 퇴직연금이 아닌 ‘퇴직급여제도’ 도입이다. 기존의 퇴직금제도와 퇴직연금의 확정급여형(DB)제도, 퇴직연금의 확정기여형(DC)제도 중 하나 이상을 택하면 된다. 기존의 퇴직금제도를 유지하든지, 새로 시행되는 퇴직연금을 도입하든지 그 여부는 각 사업장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 결정을 할 때는 노사의 협의하에 근로자대표(근로자 과반수로 이뤄진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5인 미만 사업장에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퇴직급여제도’가 적용될 전망이다.그렇다면 퇴직연금의 확정급여형, 확정기여형은 도대체 무엇일까. 확정급여형(Defined BenefitㆍDB)은 근로자의 연금급여가 사전에 정해지며 사용자의 적립부담이 적립금 운용결과에 따라 변동되는 제도다. 반면 확정기여형(Defined ContributionㆍDC)은 사용자의 부담금이 사전에 확정되고 근로자의 연금급여는 적립금 운용결과에 따라 달라진다.이렇듯 기존 퇴직급여제도와는 판이하게 다른 퇴직연금을 기업들이 당장 도입할까. 대다수의 기업은 아직까지는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정부안을 검토하며 퇴직연금이 무엇인지 개념을 익히는 수준이다. 제도도입이 기업의 의무가 아닌 노사의 자율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선뜻 나선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반면 금융권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퇴직연금이 실시되면 자본시장이 발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정급여형, 확정기여형에 따라붙는 ‘적립금운영’ 부분이 자본시장을 활짝 피어오르게 할 전망이다. 자본시장에 지속적으로 유입될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돼서다.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되는 2010년이 되면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최소 100조원에서 최대 2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중 특히 간접투자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적립금의 안정성과 수익성 확보를 위해 선진적 금융상품 개발에도 가속도가 붙게 된다.김영익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그동안 국내 주식시장은 외국인의 동향에 따라 움직였던 반면, 퇴직연금의 시행은 국내 수요를 확대하는 데 기여해 주식시장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이렇듯 퇴직연금으로 운용할 자금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금융기관들은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 투신운용사, 보험사는 퇴직연금 전문인력을 보강하며 상품개발에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퇴직연금시장을 황금어장으로 본 금융기관들은 아직까지는 웃음을 감추고 있다. 곧 다가올 퇴직연금 유치전쟁을 준비하며 상품개발에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다. 아울러 치열한 인력 스카우트전에도 뛰어든 상황이다.퇴직연금시대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남은 과제도 만만치 않다. 일단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연금제도 설계, 자산운용, 제도관리 등 퇴직연금의 다양한 분야의 국내 전문가는 손에 꼽힐 정도다. 퇴직연금 전문가들도 “퇴직연금과 관련된 특정분야는 잘 알지만 퇴직연금 전반에 대해서는 종합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외에도 IT 등 전산 인프라 확충도 퇴직연금의 빠른 정착을 위해 시급하다. 아울러 국민의 불신이 쌓이지 않기 위해 퇴직연금 운영과 개선을 위한 사안을 심의하는 퇴직연금심의위원회의 역할도 중요하다.이덕희 노동부 퇴직연금추진단장은 “과거 근무기간을 소급적용하는 경우 적립금의 수준 등 퇴직연금규약 관련 하위규정 제정을 조속히 마칠 생각”이라며 “9~10월에는 퇴직연금 설명 순회 로드쇼를 진행하고, 중립적인 전문교육기관을 선정해 내년부터 무료교육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단장은 이어 “개별사업장의 퇴직연금제 설계 등 컨설팅비용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며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