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달라진 것이 한둘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공무원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의아해한 것 한 가지가 의전비서관 인사였다. 의전비서관은 부속실장과 더불어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자리다. 국내외의 공식적인 모든 대통령 행사를 관리ㆍ기획하고 모양새를 가다듬으면서 외국의 온갖 인사들과 회담ㆍ접견ㆍ회동ㆍ통화하는 실무를 관장해 이전에는 경험 많은 외교관 가운데서 주로 기용됐다. 정상회담, 국제회의 참석, 외국인사 접견 등 대통령의 국제적 행사와 위상을 다분히 의식한 인사였다.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첫 의전비서관에 오랜 측근 참모인 서갑원씨(현 열린우리당 의원)를 임명,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비서관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의전팀(실제로는 수행비서)을 담당했고 대선 이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 의전팀장을 맡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사람 좋다는 평을 받는 서비서관이 의전을 맡게 되자 당시 일각에서는 “(순천)촌사람이 ‘가방모찌’를 하다 의전비서관이 됐다”며 격려 반 비아냥 반의 반응도 나왔다.그러나 당시 노대통령의 생각은 명확했다. 의전은 대통령 스타일을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하고 외교관들이 맡으면 형식과 기존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본인이 바라는 실용적ㆍ실제적인 일정이 짜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만 해도 늘 ‘비주류 콤플렉스’ 속에 권위주의 타파에 주력했던 노대통령은 “내 뜻을 잘 헤아리고 편안하게 행사일정을 진행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봤다. 외부인사 접견 등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히 큰 의전비서관에 오랜 측근을 앉힘으로써 알아서 잘해주길 바란 듯하다. 실제로 의전비서관은 대통령의 청와대 외부인사와 만남에 대한 준비ㆍ기획ㆍ실행에 발언권이 강해 이 점에서 힘이라면 힘이 있는 자리다.큼직한 체격의 서비서관은 집권 초반 한ㆍ일ㆍ중 순방과 정상회담 행사까지 수행했다. 초기 노대통령은 의전에 파격을 보여 자동차로 이동할 때 도심의 교통신호까지도 사전에 조정하지 말고 일반차량들과 함께 차등 없이 신호등에 따라 움직이라고 지시할 정도였으나 경호문제가 지적되면서 이전 방식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서비서관이 정무수석실로 자리를 이동하면서 기자 출신의 정만호 정책상황비서관이 뒤를 이어받았다. 정비서관은 처음부터 “정책 의전을 하겠다”며 대통령의 일정을 정책에 좀더 맞췄다. 정부 내 각종 위원회 활동, 개혁 로드맵 구성, 혁신토론회 등의 행사가 많았다. 그러나 정비서관은 2004년 2월 17대 총선출마를 위해 물러났고 386 핵심참모에 손꼽히는 천호선 참여기획비서관으로 자리가 넘어갔다.천비서관은 부인이 노대통령의 의원시절 비서 출신인 측근으로, 노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는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당시 박주현 국민참여수석 아래에서 주무비서관으로 일하다 대통령의 바로 옆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그는 노대통령이 탄핵으로 손발이 묶였을 때 윤태영 제1부속실장 등과 더불어 울적한 노대통령과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탄핵 때 노대통령은 386 참모들에게 더 많이 기대게 됐다는 평가가 있었다.천비서관은 이후 국정상황실장으로 비서관 보직을 바꿨다가 노대통령의 임기반환점을 맞아 다시 의전비서관으로 되돌아간 독특한 케이스다. 그는 윤부속실장과 더불어 유이(唯二)하게 노대통령 취임 후 한 번도 청와대를 벗어나지 않은 참모다. 또 비서관 보직만 참여기획ㆍ정무기획ㆍ의전ㆍ국정상황실장ㆍ의전 등 5번을 바꿔 맡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노대통령의 참모인사를 지칭해 카드돌려막기식이니 회전문인사니 하며 비판할 때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됐다.같은 자리에 노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기용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기대를 잘 보여준다. 청와대 안에서는 천비서관의 재기용에 대해 노대통령의 ‘의전 강화’라고 평가했다. 동시에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단행된 비서실인사는 그를 의전비서관에 두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호철 제도개선비서관을 천비서관이 맡았던 국정상황실장에 보내 여러 현안을 챙기게 하는 등 비서 진용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려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갖는다. 이 평가가 맞다면 노대통령에게 의전비서관은 당장 시급한 일을 다루는 주요한 특급참모 보직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천비서관의 두 번 기용 사이의 권찬호 비서관은 4명의 의전비서관 중 유일하게 직업공무원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도 총리실 등에서 주로 일해 의전통은 아니었다. 노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인 4대 권비서관은 차분하고 꼼꼼하면서 매사 나서지 않는 완벽한 실무형 의전이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치밀하고 자기 업무에 늘 최선을 다하는 권비서관을 의전에 기용한 것은 누구든지 자기 일에 열심히 하면 대통령이 가까이에 중용한다는 메시지를 줬다”며 “권비서관이 의전을 맡을 때는 주로 혁신 등 공무원들의 일하는 방식과 개혁이 큰 관심사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성실한 권비서관을 총리실로 돌려보내 자기자리를 잡도록 풀어줬다는 해석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