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시골에 성묘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지난 봄 한식 때까지만 해도 같이 가셨던 증조할아버지 묘소에 우리 형제들만 올라가라 하셨다. 산이 너무 가팔라서 이제는 못 올라가신다는 말씀이다. 은행원으로 정년퇴직하신 후 근 20여년간 서울과 경기도 광주에 있는 시골을 매주 오가는 것으로 나름의 건강관리를 해 오시던 분이라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문득 아버지의 올해 연세가 생각나고 건강을 염려하게 됐다.아버지는 나와 꼭 서른 살 차이가 난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매우 보수적이고 엄한 분이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약주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간혹 밤 12시가 다 돼서야 귀가하실 때도 우리 형제들은 자다가 일어나 아버지께 인사 드린 후 무릎 꿇고 앉아 장시간의 훈시를 들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 때 고생하셨던 이야기부터 군사독재 시절의 정부 비판 이야기를 거쳐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마치는 늘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아버지와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 자유롭게 개인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조차 꽤나 어렵지 않았나 생각한다.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미술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도화지에 아버지를 그리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 집, 동네 등을 그리고 그곳에 서 계신 아버지를 그렸던 것 같다. 자연히 아버지 얼굴을 조그맣게 그리게 됐다. 주위 친구들의 그림을 보니 대부분 도화지 가득히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당시에는 내가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잘못 들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나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를 어렵게 느끼는 아이들이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는 해외지점으로 나가게 되셨다. 이후 중학교 졸업을 몇 주일 앞두고 귀국하셨으니 3년이 넘는 기간을 외국에서 생활하신 셈이다. 그동안 어머니는 두세 차례 한국에 왔다 가셨는데 아버지는 실로 오랜만에 만나게 됐다. 더욱 서먹해진 셈이다. 졸업식이 돼 당연히 어머니만 오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버지도 함께 오셔서 고급 음식점에서 비싼 요리를 사주시는 걸 보고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그날 이후 아버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매우 다정하고 부드럽게 변하신 것 같다. 아마도 3년 동안 떨어져 있으며 쌓인 그리움의 결과와 직접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서구식 가정을 목격하신 외국생활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 우리 형제들이 아이들에게 항상 다정다감하게 대하고 마치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다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본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아빠 얼굴을 제일 크게 그린다.내가 대학생일 때의 일로 기억된다. 서울 모 지역의 지점장이셨던 아버지가 며칠째 크게 괴로워하시는 걸 보고 학생인 나까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대출을 부탁한 업체가 자격조건이 안돼 거절했더니 소위 높은 곳을 동원해 매일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끝내 거절을 하셨고,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업체는 다른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으나 결국 부실경영으로 인해 부도가 났다고 한다. 이후에도 두세 차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웠던 시절이라 당시 대출을 허용했더라면 은행에 큰 손실을 입혔을 일들로 인해 아버지는 표창을 받기는커녕 결국 승진누락 등 직간접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셨다고 들었다.지금도 직장 후배들은 나를 보고 융통성이 없다니 혹은 도덕 교과서 같다고 하는 등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말을 하곤 한다. 그동안 나는 사회 관례상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온 여러 유혹을 단연코 거절할 수 있었으며 언제나 나름대로의 윤리 잣대를 갖고 직장생활을 해 오고 있다고 자신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아버지의 고지식해 보이지만 당당하고 곧은 직업윤리관을 등 뒤에서 보고 자라오면서 저절로 배운 것이 아닌가 한다. 요사이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지는 계절인데, 이 원고를 마무리하면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감기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다.글/문기환·(주)새턴커뮤니케이션스 부사장1958년생. 77년 서울 대일고 졸업. 81년 연세대 정외과 졸업. 84년 대우그룹 비서실 근무. 90년 (주)대우 홍보부장. 2000년 이랜드그룹 홍보상무. 2005년 8월 (주)새턴커뮤니케이션스 파트너 겸 부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