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업계는 유독 여성의 힘이 세다. 전체 종사자의 50% 이상이 여성으로 추정될 만큼 다른 업종에 비해 여성 비율이 높다. 게다가 주요 업체 임원 중에도 여성이 꽤 많다. 현장에서 뛰다 직접 조사업체를 차린 여성CEO 역시 적잖은 수다. 이 업계만큼 여성파워가 제대로 발휘되는 분야가 드물 정도로 여성파워가 두드러진다.이상경 현대리서치 사장은 국내 리서치업계의 ‘대모’이자 ‘왕언니’. 대학원 재학 중에 결혼과 출산을 하고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조사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첫 번째 여성CEO가 된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사장은 “87년 창업할 때만 해도 한국갤럽, 한국리서치 등 1세대 조사업체 정도만이 활동하고 있었다”면서 “창업과 함께 대선(87년)과 총선(88년)을 경험하면서 조사업계 도약의 급물살을 함께 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를 전후해 동서리서치, 리서치앤리서치, 코리아리서치, 미디어리서치 등이 설립되면서 조사업계가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고, 공교롭게도 그 ‘역사의 흐름’을 함께 탔다는 게 이사장의 설명이다.여성CEO로는 이상경 사장이 첫 번째 케이스지만, 조사업계 입문은 최신애 한국리서치 부사장이 먼저다. 지난 81년 한국리서치에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26년째 한 직장에서, 한우물을 파고 있다. 업계에서는 1세대로 꼽히는 박무익 한국갤럽 소장, 노익상 한국리서치 사장에 이은 1.5세대로 최부사장을 첫손에 꼽는다.특히 최부사장은 입사부터 지금까지 연구파트에서 잔뼈가 굵은 타고난 조사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전문지식이나 포부를 갖고 입사한 것은 아니었다”면서 “사회학 전공 여학생이 진출할 수 있는 한정된 분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업무를 익히면서 점차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결국 천직이 됐다”고 말했다. 최부사장은 또 “80년대 조사기법은 전화나 설문조사 고작인데다 컴퓨터가 드물어 수작업과 타이핑을 통해 분석과 보고서 작성을 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통해 새로운 조사기법을 배우고 세계 조사 모임에 참석해 정보를 교류할 정도로 업무환경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최정숙 포커스리서치 사장도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실무를 시작한 1.5세대에 속한다. 최사장은 특히 창업기간에 비해 탁월한 비즈니스 실적을 이끌어내 역량 있는 CEO로 호평을 받고 있다.최사장은 지난 83년 오리콤 조사부에 입사한 후 AC닐슨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2001년 10월 지금의 포커스리서치를 설립했다. 그는 “최고의 정성조사 전문회사라고 자부한다”고 강조하면서 “국내 최초로 정성조사(FGI) 인터넷 생방송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시설과 전문인력을 갖췄다”고 힘줘 말했다.최사장의 자신감 배경에는 국내외 조사업체에서 두루 쌓아온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외국계 조사업체가 득세하고 있지만 별로 겁나지 않는다”면서 “대기업의 리서치회사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외국계와 견줘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신은희 AC닐슨 부사장, 김정혜 코리아리서치 이사, 윤자경 ORC코리아 사장, 공인숙 서울마케팅리서치 전무 등은 2세대 혹은 차세대 주자로 꼽힌다.신은희 부사장의 경우 미국에서 심리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후 AC닐슨에 입사, 11년 만에 최대 실적을 내는 조사업체의 부사장에 올랐다. 신부사장은 “늘 변화하는 흐름을 잡아내야 하고, 전 산업 분야에 대해 탐구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게 조사의 매력”이라고 말하면서 “조사결과 때문에 인사고과에 나쁜 영향을 받거나 신제품 출시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가 생길 때는 안타깝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아직 리서치 활용에 눈을 뜨지 못한 기업들이 많다”면서 “업계가 자리를 잡고 도약하는 데 한몫 하고 싶다”는 포부를 덧붙였다.김정혜 코리아리서치 이사는 지난 92년부터 13년간 조사업계에 몸을 담고 있다. 미디어리서치에서 시작, 코리아리서치로 옮겨 이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특히 김이사는 다른 여성 전문가들과 달리 정치ㆍ사회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여론조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면서 “조사 영향력이 크게 높아져 정치ㆍ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보람이 크다”고 밝혔다. 김이사는 또 “외국에선 60~70대가 돼도 분석가로 활동하는 전문가가 적잖다”면서 “오래도록 리서처로 조사현장에 남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윤자경 ORC코리아 사장은 한국리서치와 LG생활건강, TNS, 코리아패널리서치에서 조사업무를 담당하다 지난 2003년 미국계 마케팅 조사 및 컨설팅 전문기업인 ORC의 한국법인 사장으로 임명됐다.이밖에 공인숙 서울마케팅리서치 전무와 진영선 리서치21 사장은 연구 파트가 아닌 실사 분야 출신 여성 임원 및 CEO다. 업계에서는 두 사람을 연구직이 아닌 실사 파트 출신으로는 드물게 자기계발을 통해 성장한 케이스로 꼽고 있다. 한편 조사업무의 한 분야인 좌담회를 기획, 진행, 분석하는 모더레이터(Moderator) 중에서도 여성 비중이 압도적이다. 전문 모더레이터로도 활동 중인 최정숙 포커스리서치 사장은 “주부이면서 프리랜서 모더레이터로 일하는 여성이 적잖다”면서 “개중에는 연봉 1억원 이상 버는 이도 있다”고 밝혔다. 모더레이터는 좌담회 진행능력은 물론, 시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력을 겸비해야 인정받는 직업이다.조사업계 여성 전문가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공분야가 사회학, 심리학, 철학, 신문방송학 등 사회인문계열이라는 점과 조사업무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똘똘 뭉쳤다는 것. 또 조사업계 특성상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기에 좋은 분야라는 점에도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신은희 AC닐슨 부사장은 “외국의 조사업계도 여성 비율이 아주 높은 편”이라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탐구심과 학구열, 세심한 분석능력을 갖췄다면 여성이 제 능력을 발휘하기에 아주 적합한 분야”라고 말했다. 김정혜 코리아리서치 이사도 “전체 3분의 2 정도가 여성 직원이고 다른 회사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밝히고 “진입장벽에 남녀 차이가 없는 만큼 여성들이 꿈을 펼치기에 좋은 분야”라고 평했다.또 최신애 한국리서치 부사장은 “마케팅조사의 경우 생활용품 소비자조사가 많아 여성의 접근성이나 꼼꼼한 성향이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여성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업종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INTERVIEW / 이상경 현대리서치 사장24년 경력 여장부 … ‘여성인재 도전할 만’“딸아이 첫돌 치르고 출근해서 24년째 쉬지 않고 한우물만 팠네요.”이상경 현대리서치 사장(50)은 조사업계 여성 전문가 가운데 나이나 경력으로 ‘최고참’이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전공한 후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조사업무를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다. 주부이자 엄마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순탄치 않은 출발이었지만, 지금 이사장은 조사업계를 대표하는 여장부로 당당히 명성을 떨치고 있다.“이 분야 전문가가 되겠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실무를 하다 보니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되고 비즈니스 가능성도 엿보게 된 거죠. 창업 후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작은 규모의 후발주자인 만큼 경쟁을 피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블로오션을 찾아야 했지요.”IMF 위기 때는 광고효과 측정 관련 신규사업을 시도했다가 적잖은 ‘수업료’를 내기도 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지난 99년 IT 기반 리서치시장에 진출해 ‘메트릭스’를 설립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틈새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메트릭스는 유수 기업으로부터 투자유치에 성공하는 등 순조롭게 출발, 지금은 흑자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부터는 한국인터넷마케팅협회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기도 하다.이사장은 조사업계 발전을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다. 그는 “민주화가 진척되고, 자유시장 경쟁체제가 자리를 잡을수록 조사업계가 발전한다”면서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만큼 시장규모도 해마다 쑥쑥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능력 있는 여성 인재가 뜻을 펼 수 있는 장”이라며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조사기법이 감성적 접근을 중시하는 정성조사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만큼 여성 특유의 세심함이 큰 장점이 됩니다. 소비자의 70%가 여성인 만큼 여성의 마음을 읽는 데도 유리하지요. 물론 인적 네트워크 등 리서처로서 자질을 충분히 갖춰야 성공에 다가갈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