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가 얼어붙은 강물 위에 누워 밀애를 나눈다. 빙판은 금세 깨질 듯 금이 선명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로맨틱코미디 <이터널 선샤인>(감독 미셀 공드리)의 이 도입부는 사랑의 속성을 보여준다. 사랑은 곧 깨질 듯이 허약한데 사람들은 기꺼이 목숨을 건다.복선이 암시하듯 두 연인은 이내 사랑의 미로를 헤매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상황은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아픈 사랑의 기억을 삭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가능할까.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은 사람의 속내를 탐험하려 했던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과학적 진실성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가상에서 진짜 사랑의 느낌을 대리체험하도록 하는 게 목표다. 해피엔딩의 이야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독특한 컨셉의 이 작품은 대사가 중심인 대다수 로맨틱코미디와는 다르다. “뇌사상태에 빠진 할리우드 로맨틱코미디물에 대한 카우프만의 멋진 힐책”(뉴욕 포스트지)이란 비평도 그래서 나온 듯하다.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이른바 사랑의 리셋증후군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말다툼 끝에 이별한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우고 새로운 인연을 쌓고자 한다. 그런데 조엘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삭제하면서 스스로 고립의 섬에 빠지게 된다. 주변인물들도 하나씩 사라지고 그녀와의 추억은 지워버리기에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사랑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자세라는 함의다. 또한 사랑의 추억이란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이 작품은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란 의식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의식의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주변인물들도 추억을 삭제했지만 우연한 순간에 동일한 상대를 향해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그러나 조엘의 눈에 비친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시시각각 바뀌어 있다. 사랑은 질투와 욕망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심리를 다룬 만큼 장면구성도 몽환적이다. 주인공은 문득 해변의 침대 위에서 깨어나고, 바깥에 내린 비는 어느새 방안에 젖어들고, 난장이가 된 주인공은 싱크대에서 목욕한다. 장소와 인물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환상적인 장면으로) 머리를 아무리 돌려봐도 얼굴 생김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꿈의 형상화가 뛰어나다.11월10일 개봉, 15세 이상.개봉영화▶레전드 오브 조로19세기 캘리포니아주를 배경으로 미국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총과 칼이 함께 빚는 정교하고도 활기 넘치는 액션신이 볼거리다. 감독 마틴 캠벨, 주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캐서린 제타 존스, 루퍼스 시웰▶새드 무비사랑과 이별의 방정식을 수채화처럼 그린 멜로. 여러 커플들은 이별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상대와 깊은 관계에 빠져든다. 세련된 감성이 전편에 깔려 있다. 주연 정우성, 차태현, 임수정, 손태영, 신민아, 여진구, 염정아, 이기우, 감독 권종관▶야수와 미녀서양 고전 <미녀와 야수>를 한국적으로 패러디한 로맨틱코미디. 스스로 못난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아름답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여인과의 연애에서 겪는 말 못할 고민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신민아와 류승범, 김강우가 주연했다. 감독 이계벽▶오로라공주여성 연쇄살인마를 다룬 스릴러. 엽기적인 살인장면이 충격적이다. 그러나 살인의 전모가 일찌감치 노출되기 때문에 흥미는 반감된다. 배우출신의 방은진이 감독으로 데뷔했다. 주연 엄정화, 문성근▶사랑해 말순씨1970년대 말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의 눈으로 본 세상. 아름다운 옆방 누나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엄마는 무식하고 촌스러워 피하고 싶다. 가난하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다. 감독 박흥식, 주연 이재응, 문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