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으로 신분이 바뀌고 애들의 출생으로 다시 신분에 아버지라는 단어가 추가된다. 사회에서의 신분변화가 책임을 수반하듯 가정에서의 신분변화 또한 책임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정의 의미도 사회 발전단계에 따라 변화하는 것 같다. 농업사회에서 가정은 생산의 최소단위요, 가족은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자식을, 그것도 사내아이를 많이 두는 건 풍부한 노동력 공급을 가능케 했기에 남아선호사상이 생기게 됐다.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력이 많이 약화되고 가족간 접촉시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제 다시 사회는 산업사회를 지나 지식사회로 변하면서 남자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자신감을 잃고 점점 ‘아버지이기’를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의 사용빈도가 줄어들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농업사회는 경험이 지배하던 때였기에 경험이 제일 많은 아버지가 전지전능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디지털기기의 사용이 삶의 보편적 수단이 되면서 아버지라는 위치가 전능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게 됐다. 아버지는 엄지손가락으로 재빠르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자녀들을 보면서 입을 벌릴 뿐이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의 아버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가정을 경영학적 입장에서 보면 남녀가 사랑을 각각 투자해 이루는 합작투자법인(조인트벤처)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을 기본으로 운영되는 이 합작법인에는 가장인 남편이 CEO다. 그래서 나는 ‘가정은 사랑을 자본금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자녀가 이 공동체의 최상의 성과인 만큼 가정의 CEO인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가정을 경영할 의무가 있다. 또 가정을 경험의 공동체라고 생각할 때 가족들은 아주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함께 생활해야 한다.요즘 우리 사회에서 많이 나타나는 ‘기러기 아빠’도 가정의 CEO인 가장이 CEO이기를 포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회사의 자본금이 없어지면 파산하듯 가정에서도 가정의 자본금, 곧 사랑이 없어지면 이혼하거나 문제아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가정의 CEO는 가족들에게 세심하게 배려해 가정에서 사랑이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나의 경우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6개월간의 일본 연수기간과 쿠웨이트 건설현장에서의 7개월간, 아들이 군대훈련을 받는 기간 등에는 편지봉투에 번호를 매겨 매일 일기를 쓰듯 편지를 썼다.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편지로 매일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족이 서로 공유하도록 했다. 신병훈련을 받는 동안 매일 편지를 받아본 아들은 힘든 훈련기간에 나의 편지를 기다리는 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가정의 CEO로 나는 내부고객인 아내와 애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갖기 위해 매월 가정의 날을 정해 꼭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만들고 매년 휴가계획을 세워 가족들이 여행을 통해 경험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가족 스포츠를 정해 애들에게 모두 가르쳐 시간을 함께 갖도록 함으로써 경험을 함께 나눴다. 이런 활동을 통해 가정의 전통적 가치가 애들에게 자연히 전승되도록 했다. 그리고 가정의 구성원에게 가능한 칭찬을 많이 해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계발하도록 도왔다.아버지들이 사회생활에 쫓겨 가족 구성원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하면 자칫 사회적으로는 성공하더라도 가족간에 문제가 생겨 사회적 성공이 빛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가족들은 돈보다 가정의 CEO인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하길 원하기 때문에 사회활동과 가정생활에 적절히 시간을 배분할 필요가 있다. 애들이 성장해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멘토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바람직한 아버지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아버지들은 가정경영의 CEO로서 그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질 것 같다.글/제갈정웅ㆍ대림학원 이사장경기고와 서울대 상대, 일리노이 MBA를 수료한 후 대림산업, 서울증권 상무를 지냈다. 현재 대림아이앤에스 부회장과 대림학원 이사장이다. 한국M&A협회 회장직도 수행 중이다.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이다. <하늘에 띄우는 연가> 등 저서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