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7일 선죽교. 수백명의 남한 기업인들이 개성공단 탐방을 마친 뒤 인근 선죽교에 잠시 들렀다. 이들은 돌다리로 몰려가 정몽주의 혈흔이라는 붉은 자국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한데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는 기업인 한 명이 있었다. 일흔이 훨씬 넘은 은발의 조영승 삼성문화인쇄 사장(73).그는 남몰래 눈물을 닦느라 버스에서 금세 내릴 수 없었다. 전쟁과 피란, 17세에 징집돼 사경을 넘나드는 참전, 중소기업 창업 후 역경을 딛고 걸어온 수십년의 세월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머니 품 같은 고향의 풍경에 눈 녹듯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는 선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죽교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판문점에서 차로 1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이곳을 다시 찾아오는 데 50년이 넘게 걸렸다.서울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성냥갑 같은 공장의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코바’들이 몰려 있는 성수공단이다. 그들 사이로 8층 높이의 현대식 붉은 빌딩이 우뚝 서 있다. 층고가 높아 다른 건물의 14층에 해당한다. 이곳이 삼성문화인쇄다. 대지 640여평, 건평 3,200여평(2공장 포함시 4,000여평).이 공장은 여느 인쇄공장과는 다르다. 인쇄 선진국인 일본과 독일, 미국의 관계자들이 찾아와 두 가지 때문에 깜짝 놀란다. 첫째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인쇄공장들은 대부분 비좁고 복잡하지만 이 공장은 호텔처럼 청결하다. 각층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스레 나오고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다. 외국 인쇄업계 관계자들은 자국에도 이렇게 깨끗한 공장이 없다고 한목소리를 낸다.또 하나는 고급 인쇄물을 쏟아내는 것을 보고 놀란다. 몇 달 전 일본 인쇄업계 간부가 이 회사를 찾아와 자사의 자동차 브로슈어보다 상태가 낫다며 감탄하기도 했다.삼성문화인쇄는 책과 기업체 판촉물, 캘린더 등을 만드는 업체. 직원은 60명에 연매출액 70억원(가공임만을 매출로 계상)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제작해 온 인쇄물은 최고급품들이다. 그동안 취급해 온 제품을 보면 일본항공(JAL) 캘린더를 비롯, 마루베니, 닛쇼이와이 등 일본 종합상사의 캘린더와 브로슈어, 국내 150여개 업체 홍보책자 등이다.일반 책자는 컬러도감, 문화재도록 등 가장 까다롭다는 것들을 주로 만든다. 대통령 사진은 어느 나라건 그 나라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인쇄업체에서 제작되기 마련이다. 국내 대통령 사진(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도 이곳에서 줄곧 인쇄됐다. 렉서스와 르노삼성자동차의 브로슈어, 삼성·LG·한솔·POSCO의 사사도 이곳에서 찍혀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도록, 한국의 고궁 등 고급인쇄물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이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첨단설비, 장기근속자, 그리고 경영자의 집념이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공장에는 대당 10억원대의 고가장비가 들어서 있다. 미쓰비시의 4색·5색·6색 오프셋인쇄기를 비롯, 독일제 스탈접지기, 컴퓨터제판기 등이 공장 1층과 2층, 3층에 놓여 있다. 이중 삼원색으로 재현하기 힘든 중간색을 인쇄할 수 있는 6색 오프셋인쇄기는 국내에 몇 대 없는 장비다. 펄도장 등 고급자동차의 색상도 그대로 나타낸다.근로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20년에 이른다. 50년 동안 함께 일한 근로자도 7명이나 된다. 이들의 노하우가 어우러져 최고급 제품을 쏟아낸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사장의 집념이다. 그는 고급제품이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기업을 경영해 왔다. 조사장은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납기를 정확히 지키다 보니 인쇄비가 타사에 비해 조금 더 비싸지만 일감이 꾸준히 이어진다”고 설명한다.이 회사는 4가지가 없다. 이른바 ‘4무경영’이다. 우선 접대비라는 것을 쓰지 않는다. 인쇄산업은 전형적 수주산업이다. 주문을 따내기 위해선 영업이 중요하다. 그러나 영업부 직원이 단 3명에 불과하다. 그들조차 신규 거래처 확보를 위해 뛰어다니는 경우는 없다. 기존 거래처와 지속적인 업무를 위해 일한다. 이 회사와 수십년 동안 거래해 온 단골업체는 150여개사다.이 회사의 판촉수단은 제품 그 자체다. 인쇄물을 보고 물어물어 찾아온다. 단골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고객이 오건, 납품업체 관계자가 오건 이 회사는 손님을 모두 구내식당으로 안내해 사장과 종업원, 손님들이 함께 식사한다. 구내식당에서는 매일 종업원 식사량보다 20명분이 많은 식사를 준비한다.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고 맛있고 정성이 담긴 식사를 내놓는다.둘째, 리스가 없다. 대부분의 인쇄업체들이 비싼 설비를 리스로 들여와 사용하지만 이 회사는 현찰로 결제해 쓰고 있다. 이자부담을 줄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셋째, 행사가 없다. 보통 기업들은 매주 1회나 매월 1회 조회를 한다. 이 회사는 1년 내내 조회라는 게 없다. 심지어 지난 5월31일은 창립 50주년이었지만 이때도 기념식을 하지 않았다. 조회나 기념식을 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게 낫다는 게 조사장의 생각이다.넷째, 정년이 없다. 직원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세까지도 근무할 수 있다. 현재 70세를 넘긴 직원도 있고 환갑을 넘긴 직원도 여러 명이다.조사장은 집에서 지하철로 출근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아침 국철 서빙고역에서 6시28분 전철(용산발 덕소행)을 타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바로 조사장이다. 왕십리역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고 성수동으로 출근한다. 집에는 1,500㏄급 국산 자동차가 있지만 95세 된 장모님 수발을 위해 부인이 사용할 뿐이다. 그도 한때는 좋은 차를 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좋은 차를 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또 많이 걷는 게 건강에 좋다고 판단, 10여년 전부터 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도착하면 사내에 마련된 체육시설에서 1시간 이상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뒤 업무를 시작한다.조사장이 인쇄의 길로 접어든 것은 학비 마련을 위해 ‘가리방’(등사판)을 민 게 계기가 됐다.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중학교 3학년 시절 6·25전쟁을 맞았다. 누나와 함께 보따리를 둘러메고 남쪽으로 향했다. 종전 후 지인을 만나 서울 무교동의 인쇄소에서 등사일을 도왔고 이게 인쇄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된 것.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한 뒤 친구인 서울대 상대생 2명과 동업으로 본격적인 등사일을 시작했다. 이때가 56년 5월31일. 대학생 신분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창업했다. 투자한 돈은 겨우 등사용지를 살 정도의 금액이었다. 등사기는 고물을 주워서 썼다. 회사이름은 미경사. 1년 후 회사명을 삼성문화인쇄로 바꿨다.형편이 어려워 대학 4학년 때 자퇴한 뒤 본격적으로 인쇄일에 매달렸다. 번 돈은 모조리 설비를 사는 데 사용했다. 여건이 되는 대로 고급기계를 샀다. 가급적 싸게 사기 위해 일본을 안방 드나들 듯 방문했다. 지금까지 일본 방문 횟수가 200여회에 이른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그는 일본에 출장을 가서도 아침식사를 포함해 하룻밤에 6,000엔 이상짜리 여관에서 자 본 적이 없다. 비행기 좌석은 물론 이코노미클래스다. 도쿄와 오사카에서 일을 볼 때도 대부분 전철을 타거나 걸어다닌다.그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은 두 가지다. 첫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지 않는 삶을 사는 것. 또 하나는 장인정신으로 사는 것이다.‘생활은 검소하게, 제품은 최고급으로’라는 좌우명으로 오늘도 전철에 오르는 조사장의 발걸음은 청년 못지않게 가볍고 활기차다.약력: 1933년 개성 출생. 56년 숭문고 졸업 및 고려대 국문과 입학(4년 중퇴). 미경사 창업. 57년 삼성문화인쇄로 개명 및 대표이사(현)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