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정봉현)는 전남 목포 유달산 기슭의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동양챔피언(勝戰實)으로 이름을 날리셨다. 오로지 권투 실력 하나로 일본의 센슈이(專修)대학에 특기생으로 입학해 당시 전 일본 아마추어 밴텀급 대표선수를 거머쥐었고 그 후 프로로 전향해 챔피언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분이다. 광복 이후 영남지역의 경찰서장으로 오라는 것을 거절하고 고향 땅에서 후진 양성과 개인사업을 하면서 생을 마감하셨다.회사의 책임자가 되기 전에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백범 김구 선생님이었는데, 책임자가 된 이후 여러 부류의 사람을 접하다 보니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두 가지 가르침이 나의 인생의 큰 좌표가 되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닫게 되면서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이 아버지로 바뀌었다.어린 시절 나의 편식과 이기적인 성격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공부를 잘하기보다 항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뜻을 깨닫지 못하다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지 20여 년 만에 회사의 책임자가 되어서야 마음 속 깊이 느끼게 된 것이다. 나의 삶을 견인한 요인은 ‘리더는 지적 능력보다 인간경영(People management)이 더 중요하다’는 단순하고도 평범한 아버지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한다.아울러 ‘전쟁터에서도 공부하라’는 것인데, 어떤 환경에서도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고 절차탁마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대학 졸업 후에도 평생학습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돌이켜 생각하면 지방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차례로 낙방한 둘째 아들인 나에게 실망하셨을 법도 한데, 어려운 가정 살림에도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서울에서 후기 고교에 진학해 다시 학업에 열중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다시금 전기대학에 낙방하고, 재수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후기대학에 무난히 합격했으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대학 등록금으로 광화문에서 몰래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아버지의 운명의 날이 1년도 남지 않아서일까. 내가 기억하기에 평생토록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처음 볼 정도로 재수해서 서울대에 합격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철없는 만 스무 살로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기엔 어렸다.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당시에는 무척 드문 화장을 하도록 유언하셨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둘째는 외국에 있어 성묘를 못 오더라도 바다를 향해 절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패션 업무 특성상 설과 추석이 유럽과 미국의 패션 행사와 겹치는 경우가 자주 있어 외국에 머무르다 보면 아버지가 남기신 그 큰 뜻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공부가 다가 아니고 인간이 되어야 한다.” “공부는 책상에만 앉아서 하는 게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한다.”요즘 흔한 표현으로 “실패는 해도 좌절은 없다”는 것처럼 일본의 권성(拳聖)으로 불린 피스톤 호리구치와의 대결을 병상에서 자주 이야기해 주셨다. 첫 대결에서 너무 많이 맞아 패배했지만 절치부심해 리턴 매치에서 승리했던 이야기, 철도를 걷다가 원인 모르게 죽은 피스톤 호리구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버지는 일제 하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주었던 큰 분이심에 틀림없다 생각이 든다.아버지의 가르침 중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근검절약의 정신, 친구와 돈 거래나 보증을 서지 말고 피치 못할 경우에는 여유 있는 돈을 주어라, 가족에 충실하고 항상 정직하고 자신에 엄격하라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라고 반추해 보면서 아들 승우가 나의 나쁜 점만 닮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아버지가 그립다. 생전에 그 뜻을 많이 받들지 못해 후회가 많이 된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나의 의식세계에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깨닫고, 또한 우리 형제 모두가 그 분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면서 열심히 사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오늘도 나를 가다듬어 본다.글 / 정세혁·㈜두산 의류 BG 대표1954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철학과. ㈜두산 의류 BG 대표(현). 2003 ㈜두산 상무(폴로BU장). 2001 영창실업㈜ 전무이사(남성복사업부장). 2000 퍼베이시브테크 사장. 1981 제일모직㈜ 여성복사업부장. 처 유순신 You & Partners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