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탓하지 말고 대처능력 키워야’

권오근 재영솔루텍 사장(53)은 한 직장에서만 28년 째 근무하며 회사를 최고의 정밀 금형 업체로 키운 엔지니어다. 지난해 9월 사장으로 취임한 권 사장은 금형 업계에서 ‘앞을 내다보는 엔지니어’로 잘 알려져 있다.그는 1980년대 중반 평범한 금형 업체였던 회사를 정밀 금형업체로 바꾼 주역이다. 권 사장은 지난 1980년 안면이 있던 김학권 재영솔루텍 회장(당시 사장)의 권유로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만 해도 재영솔루텍은 직원 10여 명에 불과한 소규모 금형 업체에 불과했다. 일본 등 경쟁 국가에 비해 기술도 크게 뒤처져 있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권 사장은 이런 척박한 환경을 ‘도전할 만한 상황’이라고 여겼다.그는 입사 후 굵직굵직한 사업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회사를 일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5년께 권 사장은 해외 시장을 몇 차례 조사한 후 ‘일반 금형 제품을 만들어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른을 갓 넘긴 청년이던 그는 김 회장에게 “사업 방향을 정밀 금형 분야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고 고언했다. “기술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정밀 금형이냐”고 묻는 김 회장에게 권 사장은 “기술은 제가 배워오든 훔쳐오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말했다.어렵게 김 회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권 사장은 이후 일본과 독일 등 선진국을 넘나들며 기술을 배웠다. 한 해 절반가량은 해외에서 머물렀다. 기존 제품을 연구하거나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는 것은 물론 담당 기술자를 구슬러 ‘팁’을 얻어내기도 했다. 밤잠을 제대로 못 자 몸이 축났지만 일단 초기 기술 몇 가지를 익히자 다양한 응용이 가능해졌다. 지금의 재영솔루텍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지금으로 치면 회사의 최고기술경영자(CTO)였던 셈”이라는 게 이 회사 유승환 이사의 평가다.실제로 그는 회사의 ‘캐시카우’ 기술을 다수 개발했다. 워크맨이 확대 보급되면서 카세트테이프 시장이 커졌던 1995년에는 오디오테이프 케이스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개발해 이 분야 선도기업으로 발돋움시켰다. 2001년에는 국내 최초로 반도체 검사 장비의 일종인 테스트 번인 소켓을 개발했다. 반도체의 하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테스트 번인 소켓에는 미세한 구멍이 균일한 간격으로 촘촘히 뚫려 있다. “반도체를 만드는 나라에서 검사 장비 하나 개발하지 못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권 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그러는 사이 회사도 부쩍부쩍 커갔다. 보유 법인만 총 10여 개. 개성공단 중국 일본에 생산 공장이 있으며 미국에도 판매법인을 설립했다.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은 모두 재영솔루텍에 금형을 맡기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총 1800억 원선. 업계 1위다.휴대폰 카메라용 첨단 유리렌즈 개발그는 지난해 9월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사장으로 승진했다. “사장이 됐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기술 개발하고 영업하고 또 기술 개발하고 영업하는 거지요. 다만 어깨는 조금 더 무거워졌습니다.”남성적인 이미지의 권 사장은 의외로 술을 잘 하지 못한다.“술은 못 하지만 엔지니어라고 회사에 박혀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영업도 해야 하고 다른 기술자들도 만나야 하는데 몸이 받쳐주질 않으니…” 그래서 그는 한동안 집에서 아내와 함께 술 마시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고 잠이 들었지만 지금은 소주 한 병까지는 버틸 수 있다는 설명이다.그는 요즘 유리 렌즈에 푹 빠져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광학기술을 가진 자가 이긴다’는 생각으로 5년 전부터 개발한 비구면 유리 렌즈가 지난해 초 완성돼 올해부터 양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비구면 유리 렌즈는 휴대폰 카메라 모듈 등에 쓰이는 초소형 신형 렌즈다. 작은 것은 지름이 2~3mm에 불과하지만 선명하고 또렷하게 화상을 잡아준다. 기존 휴대폰 카메라에는 플라스틱 렌즈가 쓰여 화질이 떨어지고 번짐 현상이 많았다. “휴대폰 카메라가 200만 화소를 넘어가는 시대에 플라스틱 렌즈를 사용하는 것은 벤츠에 자전거 바퀴를 달아놓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권 사장의 설명이다.비구면 유리 렌즈는 겉보기에는 보통 렌즈와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초점이 또렷하게 맺히도록 정확한 각도로 깎인 것이 특징이다. 일반 안경에 쓰이는 구면 유리 렌즈는 각 지점을 지나는 빛의 굴절 각도가 서로 달라 초점이 다른 곳에 생기는 현상(수차 발생)이 생긴다. 이를 정확히 계산해 수차를 없애고 초점이 한 군데로 모이도록 다듬은 것이 비구면 유리 렌즈다. 휴대폰뿐만 아니라 자동차후방주시 CCTV 컴퓨터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세계 전체적으로도 초소형 비구면 유리 렌즈를 만들 수 있는 곳은 10여 곳에 지나지 않으며 국내에서는 삼성테크윈과 재영솔루텍 2개 회사만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그가 이 기술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5년 전. 모든 기업이 ‘휴대폰 카메라=플라스틱 렌즈’라고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초소형 유리 렌즈 제작 기술은 국내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수입 단가도 비싸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권 사장은 선명도에 한계가 있는 플라스틱 렌즈가 언젠가는 유리 렌즈로 대체될 것으로 생각, 일찌감치 유리 렌즈 개발에 착수했다. 1년에 서너 달씩 일본과 독일 등 광학 사업이 발달한 나라에서 살다시피 하며 시장을 파악하고 관련 인력을 스카우트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권 사장의 고집으로 비구면 유리 렌즈 생산 기술을 확보한 재영솔루텍은 작년 9월 인천 송도신도시에 3600평 규모의 R&D허브센터(JDH)를 설립했다. 올해 유리 렌즈로만 약 4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목표다. 전체 매출 목표 2600억 원의 15% 수준이다.권 사장은 2010년 유리 렌즈로만 매출 2000억 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휴대폰과 자동차는 물론 휴대용PC MP3플레이어 PMP 등 각종 디지털 기기의 기본 사양으로 카메라가 장착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한다.“자신을 지키고 주변 상황을 체크하기 위한 보안 분야나 타인과 교류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분야는 영상 정보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는 것. 그는 또 ‘시점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같은 곳에서도 더 많은 카메라가 쓰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독일 모터쇼에 가 보면 자동차 한 대에 12~16개의 카메라가 달려 있습니다. 후방 주시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는 거죠.”그는 금형 업체가 ‘금형’이라는 말에 머물러 있으면 발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수동적으로 고객의 요구에 따라 제품 틀만 짜주는 금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객이 아이디어만 갖고 오면 제품을 계획하고 디자인해서 생산까지 해 주는 적극적인 ‘제품 생산의 파트너’가 돼야죠. 송도 JDH에 디자이너 30여 명을 두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입니다.”권 사장은 한평생을 몸 바쳐 온 재영솔루텍에 대해 “아직 100점 만점에 50점 수준”이라고 박하게 평가했다. 국내에선 1위일지 몰라도 세계적으로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다. “기업은 시장 변화를 탓하지 말고 변화에 빨리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할 때까지 쉬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그의 각오다.약력:1954년 충남 천안 출생.80년 재영솔루텍 입사.2006년 9월 재영솔루텍 사장(현).이상은·한국경제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