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진검승부 펼쳐야 사업도 성공’

장면1: 1960년대 후반 서울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까까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대학생이 두루마기에 검정 고무신을 신은 채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다. 재료공학과에 재학 중인 이국로 학생. 여학생들이 지나가며 ‘이상한 사람 아니냐’며 수군거린다.얼마 뒤 왕십리 깡패들과 이 대학 학생들 간에 싸움이 붙었다. 깡패들 수십 명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채 대학 정문 앞까지 쳐들어왔다. 학생들은 겁이 나 대학 건물 안으로 꼭꼭 숨어들었다. 학생회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국로 학생이 정문으로 향해 서서히 걸어 내려왔다.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검도 유단자인 그는 혼자 왕십리 깡패 수십 명과 맞섰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칼이 푸른빛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깡패들은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드세기로 유명한 왕십리 깡패들을 단숨에 몰아내자 순식간에 그는 여학생들 사이에 ‘기인’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장면2: 1970년대 중반.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붉은 카펫이 깔린 1층 로비를 한복 차림에 짚신을 신은 사람이 들어섰다. 때마침 비가 내려 짚신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도어맨들이 달려와 힘으로 밀어냈다. 이국로 학생은 대학 졸업 후 이국로 사장으로 변신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튀는 행동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거래처 사람과 만나기 위해 조선호텔을 찾았고 평소 차림대로 한복에 짚신을 신고 조선호텔에 들어섰던 것. 그런 차림으로 다닌 것은 무명의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쉽게 각인시켜 영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그는 물건을 팔러 가서는 크든 작든 반드시 상대방 회사의 일을 도와줬다. 물건 나르기 등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을 주로 했다. ‘남을 이롭게 하는 게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에서였다.장면3: 2007년 1월 영등포 당산동. 이국로 (주)사이몬 회장(60)은 올해 두 가지 목표를 정했다. 하나는 회사 매출과 순익 급신장. 불황은 그의 안중에 없다. 또 하나는 현존하는 검도 최고수인 8단 승단 시험에 응시하는 것. 환갑의 나이에도 틈틈이 칼을 잡는다. 정신을 집중하고 땀을 흠뻑 흘려가며 검도회관에서 운동에 매진한다.이 회장에게는 일화가 많다. 1973년 대학 졸업 직후 서울 마장동에서 10평짜리 임대 공장을 얻어 파이프 제조업체를 차렸다. 종업원은 6명. 그 뒤 30여년 만에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파이프 업체로 키웠다. 경영하는 회사만 해도 지주 사이몬 등 4개사. 이 중 경기도 김포의 사이몬은 대지 8000평에 건평 3000평, 충북 음성의 지주는 대지 5600평에 건평 1200평의 공장을 갖고 있다. 전체 직원은 130명. 매출은 2005년 360억 원에서 2006년 450억 원(지주 포함)으로 25%가량 늘었다.생산 제품은 양사 모두 파이프다. PE수도관을 비롯해 가스관 이중벽하수관 PE복합관 통신관 전선관 PVC관 등이다. 플라스틱 소재로 된 파이프는 대부분 생산한다.플라스틱 파이프하면 단순한 제품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성에 따라 잘 부숴지는 게 있는가 하면 튼튼하고 가볍고 내구성이 강한 제품이 있다.좋은 품질의 제품 생산을 위해 이 회장이 최근 10여년 동안 설비에 투자한 금액만도 150억 원이 넘는다. 중소기업으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다.WPP관 등 첨단제품 속속 개발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독일 바텐필드의 압출성형기를 비롯해 이탈리아 일본 등 고급 설비를 갖췄다. 독일 바텐필드 설비는 길이가 120m에 이른다. 대당 가격은 20억 원대에 달한다. 이 설비를 4대나 갖추고 있다.끊임없는 기술 개발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사이몬은 최근에 두 가지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했다. 하나는 ‘팬도(pando)관’이다. 발명특허 2건을 획득한 이 파이프는 파이프와 파이프를 연결하는 고무가 지속적으로 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제품이다. 고무는 날씨가 추워지면 쉽게 경화된다. 그러면 파이프 이음새 부분에서 물이 새기도 한다.팬도관은 이런 단점을 없앤 것. 고무 링 안에 탄성이 있는 플라스틱 소재를 넣어 자동적으로 고무에 자극을 준다. 이를 통해 고무가 경화되는 것을 막아준다.이 회장은 “고무 수명이 20년 이상으로 길어질 뿐만 아니라 물이 새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이 제품에 대해 신기술 심사도 요청해 놓은 상태다. 이 제품은 3월부터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다.또 하나는 대기업 중소기업 학계 정부(산업자원부 중소기업청 기술표준원 등) 등 다자간 협동을 통해 동종 업체들과 공동 개발한 ‘WPP(Water Power Pipe)관’. 수도관 등으로 쓰일 이 파이프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조의환 박사, 한양대 공대 임승순 박사,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 방문교수인 구자공 박사 등과 함께 개발한 제품. 업계에선 대림산업 건설화성 동원프라스틱 미래화학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 기관과 업체들을 아우르는 단체는 한국플라스틱관기술연구사업협동조합이고 이 회장은 이 조합의 회장을 맡고 있다.기존 수도관은 파이프가 두껍고 내경이 작아 유량 이동속도도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또 이음관과 파손 등의 문제로 중간에 새는 물이 많았다. 이 회장은 “이번에 개발한 WPP관은 이런 단점을 없앤 제품”이라고 설명한다. 대기업은 물성이 뛰어난 원료를 개발했고 사이몬을 비롯한 중소기업은 제품 생산에 나서게 된다.이에 앞서 지난 1990년대에는 영하 섭씨 60도에서도 견디는 우레탄 단열관을 국내 최초로 생산해 평화의 댐에 시공하기도 했다. 그 지역은 암반이 많아 파이프를 매설하기 곤란한 지역이다.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 일반 파이프는 견딜 수 없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끄떡없는 제품을 만들어낸 것이다.지하 매설용 통신관의 경우 국내 최대 생산 업체이기도 하다. 물보다 훨씬 무거운 복합관도 만들고 있다. 자체 무게 때문에 물에 가라앉아 변형이 적은 파이프다.회사명인 사이몬은 시몬 베드로에서 따온 그의 영세명이자 ‘사막의 폭풍’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사업을 할 때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사막의 폭풍처럼 적극적으로 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국내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협동조합인 한국프라스틱협동조합의 이사장을 4번 연임한 경력을 갖고 있다. 도합 10년 동안 플라스틱 업계를 이끌었다. 또한 플라스틱자원순환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뒤 2005년 중반부터는 회사 일에만 전념해 그해 매출을 60%가량 늘려 놨다. 생산 제품 중 90%는 국내에서 판매하며 약 10%가량만 수출하고 있다. 수출 지역은 일본 인도 아프리카 등이다.그는 사내에 ‘블랙 스파이더’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제도는 근무 경력이 10년 이상이고 자타가 공인하는 회사에 대한 공헌자 중에서 선발한다. 블랙 스파이더로 선정되면 황금패가 수여되는 동시에 평생 근무와 함께 자녀들의 입사도 보장된다.현재 블랙 스파이더로 선정된 사람은 장예식 김포공장장, 박종찬 음성공장 부사장, 장연희 영업담당 이사, 유병용 관리담당 이사, 한희선 운전사 등 5명이다. 이들은 모두 검도 유단자이기도 하다.회사의 사훈은 입정(立正). 바른 것을 세운다는 의미다. 검도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검도는 세 가지 예를 중시한다. 국가에 대한 예, 스승에 대한 예, 상호간의 예. 그러면서 남을 죽이는 게 아니라 검을 통해 살리는 정신이다. 악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살리는 게 검도 정신의 하나라고 그는 설명한다.올해로 10년째 검도 7단인 그는 “매순간 진검승부 정신으로 사업을 해 왔다”고 강조한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싼 재료를 쓰지 않고 품질을 속이지 않는 정도 경영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자사 제품의 가격은 타사 제품보다 조금 비싸다고 설명한다. 이 회장은 “정직하고 바른 길을 걷는 게 사업 성공의 길”이라고 단언한다.약력:1947년 충북 진천 출생. 73년 한양대 재료공학과 졸업. 73년 지주 창업 및 대표이사(현). 78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 93년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 이사장. 96년 (주)사이몬 창업 및 회장(현). 99년 산업포장 수상. 2001년 동탑산업훈장. 2002년 플라스틱자원순환협회 회장. 2006년 한국플라스틱기술연구조합 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