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미크론 세계에서 승부걸다

인맥과 친분 관계에 의해 돌아가는 현실을 비관한 한 의사가 남쪽 바다로 기나긴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난파당해 도착한 곳은 ‘소인국’. 키가 15cm밖에 되지 않는 인종이 사는 국가에서 그는 졸지에 거인이 된다. 한꺼번에 수천 명 분의 식사를 하는가 하면 소변으로 왕궁의 화재를 진압하기도 한다.걸리버의 이런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다. 적층형 콘덴서를 보면 우리 스스로가 엄청난 거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500층짜리 건물(콘덴서)의 높이가 1m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경기도 화성시 북양동. 서해안고속도로 비봉인터체인지에서 제부도 방면으로 6km쯤 가다보면 왼쪽 야산 중턱에 신명(사장 이정영)이라는 회사가 자리 잡고 있다. 때마침 내린 눈 덕분에 회사 주위는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하고 있다.부지 1800평, 건평 500여 평의 이 회사 공장 안에선 사람 키만한 높이에다 길이가 21m에 이르는 거대한 기계가 제작되고 있었다. 적층형 세라믹 콘덴서(MLCC;multi-layer ceramic condensor)를 굽는 설비다.콘덴서의 크기는 가로 세로 두께가 각 1mm 이하다. 이 얇은 콘덴서 안에는 무려 500~600층의 세라믹 판이 켜켜이 쌓여 있다. 미크론 단위의 작은 판이다. 게다가 세라믹 판들 사이엔 적당한 간극이 있다.전기로의 온도는 섭씨 1350도의 고온이다. 전기로의 내부에는 제품의 산화를 막기 위해 질소와 수소 등이 주입된다. 이 과정을 통해 반죽된 파우더는 비로소 돌처럼 단단해진다.이 설비 한 대면 월 15만~20만 개의 적층형 세라믹 콘덴서를 구울 수 있다. 이 설비는 삼성전기 삼화전자 삼화콘덴서 등에 납품된다. 설비의 특성상 전량 주문 제작된다. 또 이 설비에서 만들어진 콘덴서는 휴대폰은 물론 MP3 DMB CD플레이어 내비게이션 TV 등 거의 모든 가전제품이나 통신기기에 사용된다.휴대폰에는 보통 100개 이상의 아주 작은 콘덴서가 들어 있다. 이 콘덴서는 충전된 배터리의 전류를 받았다가 반도체를 비롯한 각 부품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신명은 기계를 제작하는 중소기업이라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업체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이나 가전제품 정보통신기기에도 이 회사의 전기로에서 구워진 콘덴서가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신명은 지난해 매출액이 120억 원(군포에 있는 자회사 신명기전 매출 포함)에 불과하지만 콘덴서 등을 굽는 고온 소성로 분야에선 국내에서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업체이기 때문이다.주력 생산품은 적층형 세라믹 콘덴서를 굽는 ‘전자동 푸시 타입(Push Type)가스 분위기 소성로’와 ‘메시 벨트 컨베이어식 가스 분위기 소성로’다. 전자는 자동으로 밀어서 세라믹 콘덴서를 굽는 장치고 후자는 그물망 형태의 벨트로 이동시켜 소성하는 설비다.또 다른 주력 제품은 OPC 드럼 코팅 라인. 이 장치는 복사기 프린터의 드럼을 코팅하는 장치다. 이 설비는 파캔OPC 알파켐 켐스 등 국내 업체에 납품하며 최근 동남아 바이어로부터 300만 달러어치를 수주해 오는 5월까지 선적할 예정이다. 또 자동 땜질장치인 솔더링 머신도 만들어 판매한다.중국·베트남 시장 공략 계획신명은 연구개발에 적극 나서는 기업이다. 공장 안 기술연구소에는 7명의 전담 연구 인력이 일하고 있다.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일본의 시라이시전기와 기술제휴를 맺고 첨단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체 기술력이 없으면 첨단기술도 받아들일 수 없다. 고온 소성로의 온도 편차가 5도 이내로 유지되는 것도 이런 연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신명은 특허 실용신안 등 각종 지식재산권을 10여 건 보유하고 있다. 기술 제휴 업체인 시라이시전기는 공업로 전문 업체로 세라믹 기판 소성로, 압전소자 소성로 등을 만들고 있다.이정영 사장(60)은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뒤 한창섬유 등 섬유 업체에서 근무하다 대구의 기계공장을 인수한 지인으로부터 영업과 무역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계 분야와 인연을 맺었다.8년 정도 경험을 쌓은 뒤 1985년 경기도 부천 송내에서 7명의 직원으로 창업했다. 처음 만든 제품은 자동 용접 기계. 그 뒤로 TV부품 자동 생산 라인과 스피커 자동 제조 라인을 속속 국산화했다. 1989년 군포로 이전한 뒤 VCR 헤드드럼 제조 라인, 세라믹 글라스 공업로, 푸시 타입 소성로 등을 잇달아 개발했다.신명이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장의 독특한 기업 경영에서 비롯된다. 그는 무차입, 무비밀, 무분규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이른바 3무(無)경영이다. 그는 번 돈으로 투자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다. 군포에 이어 화성 공장을 건설했지만 대부분 내부 유보로 쌓아둔 돈으로 지었다. 여전히 부채비율은 50% 이하이며 당좌 자산을 감안하면 부채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회사측은 설명했다.매출 이익 등 경영 실적은 모두 공개한다. 누구나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안다. 그러니 노사분규가 있을 수 없다. 창업 이후 22년 동안 단 한번도 분규를 겪은 적이 없다.신명도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다. 바로 외환위기 때다. 수주가 거의 없어 내수 매출이 격감했다. 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신규 투자에 나서는 기업이 없어 경영난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라고 이 사장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회고한다.하지만 건실하게 경영해 온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외국 회사를 통해 솔더링 머신을 외상으로 수출하고 받지 못한 돈이 100만 달러에 달했는데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급등하면서 당시 원화로 8억5000만 원선이던 수출 미수금이 17억 원으로 급증했고 이에 대한 결제가 이뤄진 것이다. 앉아서 8억 5000만 원의 환차익이 생겼고 이게 기사회생의 재원이 됐다.이 사장은 “각종 기계 설비를 일본 제품과 비교하면 정밀도와 내구성 등 품질은 비슷한 반면 가격이 20%가량 싸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밝혔다. 최근의 엔화 절하 이전에는 일본 제품에 비해 30% 이상 저렴했었다. 요즘엔 이 폭이 20%로 좁혀졌으나 여전히 경쟁력이 있다고 덧붙인다. 이를 위해 꼼꼼히 품질 관리에 나서고 있으며 ISO9001과 14001도 획득했다.신명의 올 매출 목표는 150억 원이다. 이 사장은 자동화 설비와 소성로 분야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20여 개에 이르는 국내 전자부품 업체에 대한 양질의 제품 공급과 아울러 이들 제품 수출에 적극 나설 생각이다. 특히 중국 베트남 인도 등의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만큼 이들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 이 사장은 베트남을 방문해 이 시장을 샅샅이 살펴보고 돌아왔다.이 사장은 “해외 바이어들이 전자부품 업체에서 신명의 기계설비에 대한 품질을 확인한 뒤 국내로 찾아와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하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해외로 뛸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매출액의 10% 안팎에 그쳤던 수출 비중을 올해는 30%까지 높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약력:1947년 경북 경산 출생. 66년 대구 계성고 졸업. 71년 한양대 섬유공학과 졸업. 75년 한창섬유 입사. 77년 신생공업 입사. 85년 신명기전 창업 및 대표(현). 94년 (주)신명 설립 및 대표이사 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