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보고’ 불명예, 독립운동으로 만회

조선시대 최대의 국란인 임진왜란은 왕실과 조정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그런데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선조 임금과 중신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이가 있다. 의성 김씨를 명문가의 반석 위에 올린 학봉 김성일(1538~93)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왜국의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 통신사로 파견됐다.학봉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고봉 기대승, 동고 이준경과 함께 당대의 ‘핵심 인재’ 3인으로 천거한 인물이 바로 그다. 그런 그가 통신사로 다녀온 후 국왕에게 왜적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는 보고를 했다. 반면 정사인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을 주장하며 선조에게 간언할 정도로 왜적의 침략 가능성이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학봉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한 것이다.이에 당시 재상이던 서애 유성룡이 학봉에게 왜구가 정말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보고를 했느냐고 묻자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거짓 보고’를 했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국가적 위기 상황을 불러오는 전쟁의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는 희생양이 됐다. 당시 선조가 율곡의 10만 양병론마저 묵살했고 조정 대신들도 전쟁의 위기 앞에서도 당파싸움에 골몰했다. 정작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학봉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학봉은 왜적의 정세에 대한 ‘잘못된 보고’로 인해 상황을 오판하게 한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다. 이는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자신에게 수치이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그런데 학봉에게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왜적이 침략해 유린당하고 있는 경상도에서 왜적 방어의 총책인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받아 급파됐다. 그로서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의도된 실언’(?)으로 위신이 추락됐지만 영남에서는 여전히 그의 인품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전란의 흉흉한 민심을 추스르고 왜적의 침입을 결사항전으로 막기 위해서는 학봉을 적임자로 판단해 급파했던 것이다. 그는 선조의 기대대로 경상도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나아가 진주성 1차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무엇보다 민심을 집결시켜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결국 그는 전쟁의 총책임자로 왜적과의 싸움을 지휘하다 1593년 5월 진주성에서 과로 누적으로 전염병에 걸려 순국했다. 아들 혁도 함께 죽었다. 그는 이미 경상도 초유사로 나서며 한강을 건너면서 죽음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국방의 중책 맡고 남방으로 떠나가니(仗鉞登南路)/외로운 신하 한번의 죽음 이미 각오했네(孤臣一死輕)/눈앞에 늘 보던 저 남산과 한강물은(終南與渭水)/뒤돌아보니 마음속 깊이 잊혀지질 않는구나(回首有餘情)’어쩌면 학봉은 순국함으로써 그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반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300년이 지난 후 다시 왜적이 강토를 유린하자 그의 후손들이 다시 왜적에 대항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이 집안에서만 무려 11명이 독립유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학봉의 13세 종손인 김용환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를 자처하며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손들은 아직도 학봉의 ‘의도된 실언’을 깊이 사색하며 나라사랑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의성 김씨 가문은 학봉의 순국정신을 딛고 조선의 명문가로 우뚝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역사의 반복’을 떠올리게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5년 후가 불안하다”며 경제위기론을 언급했다. 반면 청와대는 위기를 과장하지 말라고 일축한다. 이건희 회장이 율곡 이이인가, 아니면 노무현 대통령이 학봉인가 선조인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으로’ 역사가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경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어찌됐건 학봉이 행한 ‘반전의 리더십’이 절실한 시대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