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요? 여기서는 불지 않아요’

“경기가 살아났다구요?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지, 대체 어디가 풀렸다는 건지 원.”충북 청주의 플라스틱 용기 업체 충북플라스틱 이천근 사장은 경기가 살아났느냐는 질문에 “대기업 경기는 좋아졌는지 모르지만 중소기업에 ‘훈풍’이 불어오려면 아직 멀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경기가 정말 좋아졌다면 유통점들이 납품 물량을 늘리라고 요구할 텐데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다”며 “정부에 단체수의계약 형태로 공공 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최근 수의계약제가 폐지되고 경쟁 체제로 전환되면서 체감 경기는 더 나빠졌다”고 토로했다. “원래 중소기업은 경기가 얼어붙는 것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지만 경기가 풀리는 건 잘 느끼기 어렵지 않습니까. 선거철이 다가오니 정부에서 경기가 잘 풀린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요?” 자조적 어투다.◇중소기업 체감경기 ‘냉골’= 양극화된 경제 구조 때문일까. 경기가 풀렸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아직 체감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파주 선유지구에 입주해 있는 LCD부품업체 D사는 “LG필립스LCD가 새 LCD 패널 생산 설비인 P8라인을 증축하기로 한 것을 믿고 파주에 왔는데 증축이 계속 지연되고 있어 매출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며 “경기가 풀린 것을 알아보려면 조선업을 하는 울산이나 거제도를 알아봐라. 여기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경남 창원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금형 업체 나라엠앤디의 정남화 상무는 “같은 공단에 입주해 있는 기계나 조선 업종 관련 중소기업들은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나머지 업종에는 여전히 체감 경기가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출 비중이 50%에 이르는데 원화 가치가 낮아서 실제 순익이나 매출이 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중소기업들은 으레 경기가 나쁘다고 하는 것 아닐까.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를 관할하고 있는 한국산업단지공단 경인지사의 송병태 부장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일선에서 많은 기업들을 접하고 있지만 남동공단의 영세 기업들에 ‘경기 회복’은 아직 먼 나라 얘기”라고 그는 전했다. “최근 경기 동향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중소기업들의 답변을 보면 아직 어렵다는 대답 일색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수치는 회복, 현장은 침체= 이 같은 반응은 수치상으로 경기 회복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산단공이 조사한 산업 동향에 따르면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등 전국 30개 산업단지의 3월 가동률은 85.8%에 이르렀다. 이는 전달에 비해 무려 3.0%포인트나 상승한 것이며 지난해 3월(85.8%) 이후 1년만의 최고치다. 산업단지 가동률이 증가하는 것은 경기가 상승세를 타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산단공 관계자는 “석유화학 업체인 여천NCC가 최근 대형 원유 정제 공장 라인을 확장 가동하기 시작하는 등 설비 투자를 늘린 업체가 많았고 파업과 설연휴가 있었던 1~2월에 비해 3월 달 정상 가동 일수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그러나 이 통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가동률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300인 이상 사업장) 226곳의 3월 평균 가동률은 86.6%였지만 소기업(50인 미만 사업장) 1만6649개의 가동률은 평균 78.4%에 그쳤다. 고유가와 환율 하락의 여파가 중소기업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 통계에 따르면 2001년 42%에 달했던 중소기업 수출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에 32.3%까지 낮아졌다. 3월 전체 생산액 27조5000억 원 중 중소기업의 생산 실적은 27.6%로 대기업 72.4%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전체 업체 수의 86.6%를 차지하는 50인 미만 소기업의 생산 실적은 6.7%에 불과했다.◇전기전자·자동차·건설 업종 ‘찬바람’= 이는 최근 경기 회복세를 견인하고 있는 조선·철강·석유화학 업종의 영향을 받는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협력업체를 다수 거느리고 있는 전기전자·자동차 업종 등은 최근 성장세가 둔화된 상태다. 구미의 한 휴대폰 부품 생산 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각각 프리미엄 휴대폰을 출시하면서 실적 개선에 힘쓰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것 같다”며 “협력업체들에까지 돌아올 ‘당근’은 고사하고 단가 인하 요구만 좀 줄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중소기업 비중이 높은 섬유 업종은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베트남 등 해외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밀리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정부가 강경한 부동산 과열 억제 정책을 사용하면서 건설 경기가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도 중소기업들의 경기 체감 온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건자재류가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 화성의 문틀 생산 업체 J사 관계자는 “건설 현장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KCC LG 벽산 등 대기업 제품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중소업체들이 설 자리가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피나는 영업을 통해 매출액을 늘리고 있기는 하지만 브랜드 가치가 없어 가격으로 승부하다 보니 마진율이 자꾸 떨어지고 있다”며 “기술개발을 하고 싶어도 사람 하나 새로 뽑기가 무서운 상황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