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퍼니 제 609호 (2007년 08월 06일)

내 방황을 기다려준 ‘환멸의 문장’

기사입력 2007.08.01 오후 02:35

내 방황을 기다려준 ‘환멸의 문장’
내 아버지는 1929년생이다. 요즘도 KBS TV의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고 있는 송해 선생과 갑장(甲長)이다. 6·25 전쟁 때 스물한 살이었다. 전쟁 통에 양친을 다 잃었다. 그 다음은 신산한 삶이었다. 부모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젊은이가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외로움인지를 나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는 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다. 웬일인지 아버지는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다. 남의 눈으로 보자면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은 범부(凡夫)였다.

책을 통해 도덕성이 턱없이 고양돼 있던 나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마음속의 영웅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에도 벅찬 범부였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으니 삶은 늘 곤핍했다. 끼니가 떨어져 옆집 호박을 따서 죽을 끓여낸 여종을 추궁하는 아내를 말리며 젊은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아서라, 그 아이 죄없다. 꾸짖지 마라.” 정약용은 식솔을 굶주림에 방치하고 책이나 읽으며 친구들과 어울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나도 출세하는 날이 있겠지. 하다못해 안 되면 금광이라고 캐러 가리라”고 말했다.

그 무렵 어린 여동생이 남의 집에서 돈을 훔쳐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 열 살 남짓한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담한 일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크게 낙담하고 분노했다. 이 일이 아버지의 생활력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 나는 아버지를 더욱 경원하게 됐다.

아버지의 강요로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내게 맞지 않은 옷이었다. 그러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결국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벗어버리듯 학교도 그만두고 집에서도 나왔다. 동해안의 작은 포구가 있는 곳에서 빈둥거렸다. 두어 달 있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시립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을 출근하듯 다니며 닥치는 대로 책들을 읽었다. 한편으로 고전음악감상실을 다니며 그 무렵 한창 취미를 붙이던 고전음악에 빠져 살았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희망은 없었다.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지만 그것으로 밥벌이가 될성부르지는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 아버지는 방황하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셨다. 뒷날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런 시를 썼다.

“스물 몇 해가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 부랑자처럼 함부로 떠돌며 살던 그해 / 온몸을 칼로 깎던 자학의 젊은 날들 / 스무 살의 경계를 넘어 / 막무가내로 술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 온몸엔 괴로움이 가득 고여 출렁거렸다 / 그때 괴로움들은 왜 그토록 많았을까 / 비 젖은 구두를 철벅거리며 귀가하던 나는 / 어두운 집 앞 골목 어귀에서 보았다 / 검은 유령처럼 비 맞고 서 계신 아버지를 // 나는 빗물 위에 문장 하나를 새긴다 / 누구나 고통스럽게 쓴다 / 자기가 살았던 만큼 / 누구도 자기가 살았던 것 이상으로 쓸 수는 없다 // 아버지는 내가 쓴 환멸의 문장 / 빗속에 장화를 신고 서 있는 문장 // 혀는 이미 굳고 퍼런 이끼가 돋아나기 시작한 문장 / 내가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 문장이 빗물 위에서 흩어져간다”(졸시, ‘장화를 신은 문장’)

아버지는 ‘내가 쓴 환멸의 문장’이다. 그러나 검은 유령처럼 비를 맞으며 골목길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나를 믿고 내 방황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그 아버지는 2001년에 돌아가셨다. 살아 계신 동안에 나는 아버지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그것을 뒤늦게 후회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역사에 남을 만큼 훌륭한 정약용도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서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모든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으면서도 마치 채무자와 같이 전전긍긍한다. 아들 앞에서 아버지들은 약자다. 세월이 흘러 내가 아버지가 되고 보니 나도 다를 바 없다. 아들의 눈으로 보면 나도 부족한 점이 있을 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 두 아들에게 나는 어떤 문장이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할 따름이다.

글/ 장석주 시인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시인, 문학평론가. 1979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 평론집 ‘풍경의 탄생’, 노자 읽기 ‘느림과 비움’, 산문집 ‘새벽예찬’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짓고 노자와 장자를 읽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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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7-08-01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