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현지 취재 - 말레이시아

히잡(이슬람식 두건)을 얼굴에 둘러쓴 여인들의 손에는 명품 핸드백이 들려 있다. 루이뷔통, 구찌부터 한국에서 못 보던 브랜드까지 있다. 히잡도 형형색색,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의상에 맞춰 코디했다. 화장품 숍도 만원이다. 히잡 사이로 곱게 화장한 얼굴이 보인다. 이슬람교도라고 해도 히잡 착용은 필수가 아니다. 히잡 없이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말레이인, 과감한 여름옷을 입은 화교도 보인다. 인도계와 금발의 외국인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11월 29일 오후 1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수리아 KLCC’라는 쇼핑몰의 풍경이다. 수리아 KLCC는 ‘쌍둥이 타워’로 잘 알려진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안의 자리 잡았다. 지상 88층의 초고층 빌딩은 삼성물산과 일본 하자마건설이 시공해 한국인에게도 익숙하다. 저층은 쇼핑몰, 상층부에는 국영 석유회사이자 말레이시아 최고의 기업 페트로나스가 입주해 있다. 수리아 KLCC의 규모는 엄청나다. 까르띠에, 샤넬 등 명품부터 말레이시아 현지 브랜드까지 300여 개의 숍, 극장, 식당가로 빼곡히 차 있다. 쇼핑을 좋아하는 사람조차 구석구석을 둘러보려면 진이 빠질 정도다. 평일 오후라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쇼핑몰은 북적거린다. 쇼핑몰이 벌어들이는 말레이시아 돈 ‘링깃’의 규모가 궁금해진다.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주변은 일명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린다. 돈을 벌어들이는 경제의 핵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 근방 부동산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 쿠알라룸푸르의 중심지인 이곳에는 서구풍의 레스토랑과 바, 클럽이 가득하다. 수입 자동차도 떼를 지어 다닌다.사실 말레이시아는 그동안 한국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페낭이나 랑카위, 코타키나발루 등 말레이시아의 관광지를 찾아가는 사람은 늘고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옆에 있는 동남아 국가라는 점 외에는 잘 모른다. 인도네시아 경제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갸우뚱거리는 한국 사람도 흔하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섭섭해 할 말레이시아 사람이 많다.KOTRA 쿠알라룸푸르 무역관의 황규준 관장은 말레이시아 부임 전 인도네시아에서도 일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고소득층 가운데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가정부를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 역시 5000달러를 넘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설명했다. 도심 곳곳의 공사판을 유심히 봐도 말레이 현지인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 등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외국인들이다.외국인이 몰려드는 말레이시아는 일단 인프라부터 글로벌 톱 레벨이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잘 닦인 고속도로부터 시작해 도심 위를 달리는 경전철(LRT), 철도, 항만 등이 발달해 있다. 사통팔달 뚫려 있는 도로 위를 차들이 시원시원하게 달린다. 최근 교통 체증이 심해졌다고는 하지만 서울에 비해서는 양반이다. 교육 수준도 높아 5000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인터 퍼시픽(Inter-Pacific)의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지금까지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보여 왔다. 2004년 7.1%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뒤 2006년 5.5%에 이어 올해 5.8%가 예상된다. 말레이시아의 4위권 금융그룹 RHB계열 RHB리서치연구소의 림치셍 상무는 “내수 성장을 기반으로 정부 지출과 소비 투자가 활발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2%대의 낮은 물가상승률을 바탕으로 견조한 경제 기반을 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동남아 지역의 유망 국가가 된 데에는 막강한 정부를 빼놓을 수 없다. 말레이시아는 입헌군주제 국가다. 즉, ‘왕’이 있는 나라다. 헌법상 국가원수는 ‘국왕’이다. 하지만 임기가 정해진 국왕은 9개주의 통치자인 술탄(Sultan)이 돌아가면서 맡는다. 사실상의 실세는 총리다.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집권당이 바뀐 적이 없는 정부 주도의 국가다. 전 총리인 마하티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22년간 집권했다. 정부의 강력한 공권력으로 경제 개발을 주도해 왔다. 정부는 최근 일명 ‘와와산(vision) 2020’이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2020년까지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을 선진국 대열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다. 수도 쿠알라룸푸르와 약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신행정도시 ‘푸트라자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웠다. 한강 너비만한 인공 호수와 방대한 규모의 이슬람풍 건축물을 보면 정부와 오일머니의 힘을 엿볼 수 있다.KOTRA의 황 관장은 “아시아 다른 국가에 비해 말레이시아의 특히 강한 부분이 있다”면서 “바로 외교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도 ‘미국이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치곤 한다”고 말했다. 배짱과 여유의 배경은 바로 ‘자원’이다. 내세울만한 자원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한국과 다르다.말레이시아에는 석유와 광물자원, 농산자원이 풍부하다. 주석과 팜오일, 석유를 생산하고 수출한다. 말레이시아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현재 52억5000만 배럴의 석유를 보유하고 있다. 즉, 15년치의 검증된 매장량을 보유한 순석유수출국인 것이다. 40년 이상의 가스 추정 매장량 또한 지녀 향후 20~30년간 설비 투자에 아무 문제가 없다.한반도의 1.5배 수준인 국토의 4분의 3이 밀림과 습지대로 이뤄져 있다. 이 국토 곳곳에는 팜오일을 채취할 수 있는 팜나무가 자란다. 전 세계 팜오일 물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다. 팜 오일은 식용 기름과 비누 제조 외에도 바이오 디젤의 원료 등 쓰임새가 다양하다. 전국 곳곳에 돈 벌리는 자원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다민족, 다인종, 다언어 사회라는 것도 특징이다. 전체 국민 중 말레이계가 58%, 중국계가 25%, 인도계가 7%를 차지한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말레이시아의 영국 식민지 시절 이곳으로 많이 넘어왔다. ‘바하사 말레이시아’라는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영어 또한 잘 통한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기 위해서 제2외국어로 영어를 반드시 익힌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도 있다.말레이시아 산업진흥청(MIDA)의 아지안 모하메드 유소프 디렉터는 “말레이시아 사람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종교의 자유는 물론 인정된다. 국교인 이슬람교 외에 불교, 힌두교, 기독교 등을 선택한다. 동남아의 말레이인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된 데에는 배경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전신인 말라카 왕국의 파라메스와라 왕자가 15세기 무렵 이슬람교를 수용하면서 국교가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 전체 인구의 60% 정도가 무슬림이다.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라는 부분이 최근 말레이시아의 강점으로 급부상했다. 말레이시아 산업진흥청의 유소프 디렉터는 “우리는 ‘오일 머니’라는 용어 대신 ‘페트롤 달러’라는 말을 쓴다”면서 “오일 머니를 잡으려면 말레이시아로 와야 한다”고 말했다.중동에는 두바이, 아시아에는 말레이시아가 오일 머니를 만지는 셈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적 의식(할랄)을 거치지 않은 음식과 물건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가 많지 않은 국가에 투자하고 거주할 때는 아무래도 불편이 크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는 메카로부터 할랄 인증을 발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음식을 팔 때도 ‘할랄’, 종교 의식을 거치지 않은 ‘넌(none) 할랄’ 등 구분해서 판다.말레이시아 금융시장도 이슬람 교리의 율법(샤리아)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투자 상품 개발에 골몰하고 있다. 이슬람 펀드, 이슬람 인덱스 등 다양한 상품이 탄생했다.실제로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Sukuk)의 최대 발행 국가다. 말레이시아 KIBB증권의 퉁쿠 에피다 사장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2001년 발표한 금융 분야 마스터플랜에서 ‘이슬람 금융의 허브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확실히 했다”면서 “이슬람 자본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 세제 혜택과 이슬람 율법이 맞는 규정 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올 6월 기준으로 전 세계 수쿠크 발행 금액인 570억 달러 중 56%를 말레이시아가 차지하게 됐다. 2007년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초로 600억 링깃 규모의 이슬람 주택저당채권을, 3억4000만 링깃의 이슬람 리츠를 발행하기도 했다.이슬람 금융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에피다 사장은 “모든 형태의 금융 거래에서 이슬람 율법을 준수하는 금융시장을 지칭한다”면서 “세계 인구의 28%에 해당하는 18억 명의 무슬림이 이용하는 이슬람 금융은 매년 15~20% 성장해 지난해 말 7500억 달러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받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슬람 율법 때문에 이슬람 국가나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은 이자가 아닌 배당을 주는 구조다. 아울러 이슬람 율법은 담배와 주류, 무기, 돼지고기 관련 업체에는 투자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한국 금융권도 돈 냄새 맡는 데는 발 빠르다. 이슬람 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른 말레이시아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지난 11월에는 한국투자증권과 굿모닝신한증권이 말레이시아 관련 투자 설명회를 열었다. 한국투자증권은 말레이시아 천연자원펀드 등 신상품을 개발 중이다. 굿모닝신한증권은 팜오일 PEF(사모 펀드) 투자 업무를 시작했다.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 발행 업무 또한 개시했다. “‘아시아의 이윤 센터(Malaysia your profit center in Asia)’라는 문구로 말레이시아를 홍보하고 있습니다.”다토 잘리아 바바 말레이시아 산업진흥청 부청장의 설명이다. 바바 부청장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성공한 여성 관료’로 손꼽힌다. 이슬람 문화권인 까닭에 보수적 사회로 예상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는 “정부나 기업, 금융권에는 고위직을 차지한 여성이 많다”면서 “중앙은행인 뱅크 네가라 말레이시아의 총재도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더욱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각종 제도를 개혁 중이다. 해마다 줄여가는 기업에 대한 세금(corporate tax) 또한 외국 투자자에게 매력적이다. 그는 “2007년에는 27%, 2008년에는 26%, 2009년 25% 등 기업에 대한 세금을 줄여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가 일하기 좋도록 근로 허가권(work permit)과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간소화했다. 근로 허가권을 얻는 데 걸리는 기간도 1주일 정도로 단축했다.바바 부청장은 그 무엇보다 “다른 국가와의 차별점으로 ‘삶의 질’을 들 수 있다”면서 “말레이시아는 정치와 치안이 안정돼 있는 평화로운 나라”라고 강조했다. 물가 수준도 근방의 싱가포르에 비해 현저히 낮다. 집값 또한 싱가포르의 약 6분의 1 수준이다.바바 부청장은 “특히 서비스 분야는 국내총생산(GDP)의 53.3%를 차지하고 전체 고용 인구의 48.3%를가 서비스업 종사자”라고 그 중요성을 역설한다. 말레이시아는 ‘IMP(Industrial Master Plan)’라는 정부 차원의 산업 개발 계획을 추진 중이다. IMP 1, 2단계를 거쳐 지금은 3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IMP 3을 이끌며 교역, 건설, 교육, 관광, 건강 및 의료, 운송 등 8개 분야의 서비스에 힘을 싣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까지 교육 분야의 경우 9억 링깃(2470억 원)의 외화를, 건강 및 의료 부문에서는 20억 링깃(5488억 원)의 외화를 버는 게 목표다.“말레이시아 증시의 특징은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겁니다.”피터 렁 말레이시아 증권업협회(ASCM) 회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2년간 중국에 비해서는 높은 성장률을 보이지 않았지만 석유 가스, 부동산, 플랜테이션, 건설 등에서 40%가 넘는 고성장을 이뤘다”고 말했다. 천연자원의 보고인 말레이시아답게 석유, 가스업이 말레이시아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글로벌 신용 위기의 여파도 말레이시아를 살짝 비켜갔다. 상대적으로 적게 영향을 받았다. 말레이시아는 내수 성장을 바탕으로 꾸준히 커가고 있다. 미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16.5%에 불과한 반면 중국 수출은 해마다 20%씩 늘어간다. 그는 “미국의 경기 둔화로부터 리스크는 줄이고, 중국의 도약에 따른 수혜는 높일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매년 덩치가 커지는 연기금과 평균 3.8%의 높은 배당수익률도 안전망 역할을 한다.말레이시아 증시는 올 들어 18%대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내년에도 13%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말레이시아 증시에는 1000여 개 기업이 상장돼 있고 시가총액이 45억 달러에 이른다.렁 회장은 저평가된 부동산도 말레이시아의 매력으로 들었다. 그는 “주요 아시아 국가 대비 주택 등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다”며 “기업 규제 완화 정책, 특별지구 설치 등으로 부동산 자산 가치 상승이 예측된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부터 외국인의 부동산 구입이 전면 허용됐다. 2007년 4월부터 외국인에 대한 부동산 양도세가 폐지된 것도 투자 포인트다.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