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 안소라

예술의 세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편견들이 존재한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높고 낮음과 귀함과 천함을 가르는 그 굳건한 편견에 30년 소리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이가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안소라 명창이 그 주인공이다.정선아리랑의 깊은 울림과 구슬픈 곡조에는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한(恨)의 정서가 서려 있다. 채 말도 배우기 전 그 정선아리랑의 곡조를 읊조린 아이가 있었다. 그 구슬픈 곡조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귀로 몸으로 먼저 체득한 그 아이가 수십 년 후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인정하는 경기민요의 명창이 되었다. 바로 안소라 명창이다.“어려서부터 제 주변엔 온통 정선아리랑이 넘쳐흘렀지요.” 고향이 정선인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소리를 하는 소리 집안이었기에 정선아리랑은 그녀의 머리가 아닌 그녀의 마음에 그녀의 몸에 먼저 스며들었다.“제가 1남 2녀 중 막내인데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들도 모두 소리를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많이 듣고 자라다 보니 저도 모르게 정선아리랑의 정서가 몸에 밴 것 같습니다.”그래서일까. 소리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녀의 소리를 들은 선생님들은 모두 어린 그녀에게 “넌 꼭 소리를 해야 한다” “넌 장래 명창이 될 것이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타고난 목소리도 좋지만 그 나이 또래 답지 않게 몸에 배어 있는 한의 정서와 거기에서 비롯된 구성진 소리 표현이 일품이라는 칭찬들이었다.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녀는 소리 인생이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경기민요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어요.”소리에 눈을 뜨면서부터 경기민요의 매력에 빠진 그녀였다. 흥겹고 경쾌하지만 또한 애절하고 처량한 소리, 기쁨과 슬픔,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신명나는 ‘흥’과 가슴을 에는 절절한 ‘한’을 표현하는 소리, 그것이 바로 경기민요였다.“보통 사람들은 민요가 어렵다고들 하죠. 가사도 옛날 역사에 기반을 둔 옛 가사들이고 곡도 따라 부르기 힘들다고요. 하지만 배워보면 또 신명나는 것도 경기민요만한 게 없죠. 그런 반면에 또 알고 보면 너무나 가슴 절절한 것도 바로 경기민요지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소리의 매력에 빠졌더니 30년이 훌쩍 지나가더군요.”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소리 공부를 시작한 후 30년 동안 오직 소리, 소리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스물여덟에 자신의 소리 인생을 이해해 주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단 한 번도 소리를 쉬지 않았다. 일반 직장 여성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어쩔 수 없이 휴직하는 경우가 있다. 소리를 하는 이들도 거의 대부분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해 몇 년씩 쉬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쉬지 않았다.“소리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소리를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죠. 배가 남산만큼 불렀을 때도 소리를 하러 다녔고 아이를 낳고 난 뒤에도 젖먹이 아이를 들쳐 업고 소리를 하러 다녔어요.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벌써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이니 정말 세월이 빠르네요.”물론 가족들의 협조와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소리 공부며 공연에 바빠 많은 시간 함께 있어주지 못한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명창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가슴 뿌듯해 하는 두 아이의 존재는 오늘의 그녀를 있게 한 일등 공신이다. 그녀가 평생의 스승이라고 부르는 명창 이은주 선생에게 사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경기민요에는 세 분의 중요무형문화재가 있어요. 묵계월 선생님, 안비취 선생님, 그리고 제 스승이신 이은주 선생님이시죠.”안비취 명창, 묵계월 명창과 함께 경기민요 3명창으로 꼽히는 이은주 명창은 경기민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무대에 서고 음반을 녹음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우리 민요계의 거장.“선생님의 이수자이긴 하지만 아직도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죠. 제 소리 인생은 이제 겨우 30년이지만 선생님은 70년도 훨씬 넘으신 걸요.”이은주 명창의 이수자가 되고 2001년에는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녀에게는 비로소 ‘명창’이란 타이틀이 붙여졌다.“기뻤습니다. 제 소리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죠. 단순히 타이틀을 획득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오랜 수련과 노력, 그로 인해 얻은 제 소리를 비로소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쁘기 한량없더군요.” 이후 그녀는 국악 프로그램을 비롯한 다양한 방송 출연과 무대 공연 등을 통해 명창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이 때문에 그녀가 가요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국악, 우리 소리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컸던 그녀였던 만큼 놀라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어렸을 때부터 가요계로 오라는 손짓이 많았지요. 배고픈 소리를 하느니 부와 명성을 누려보지 않겠느냐는 유혹이 많았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더랬지요.” 소리의 매력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가요계에서의 러브 콜이 통할 리 없었다. 어린 마음에 소리는 ‘높고’ 가요는 ‘낮은’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왜 변했을까.“사실은 소리 공연을 하다 보면, 특히 해외 공연이나 자선 공연을 하다 보면 여흥을 위해서 가끔 소리뿐만 아니라 가요도 한두 곡씩 부르곤 하거든요. 그러면서 가요나 노래에 대해 가졌던 편견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된 거예요.” 그녀의 노래 솜씨를 들은 지인들이나 팬들은 한 번씩만 듣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했다. 자신의 노래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을 보니 가요와 소리에 격차를 두었던 어린 시절의 편견이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그녀. 특히 3년 전 처음 그녀의 공연을 본 후부터 그녀를 위해 곡을 만들었다는 작곡가 박건 씨의 끈질긴 권유에 무조건 사양할 수만은 없었다. 3년 동안이나 자신을 기다리며 곡을 다듬을 정도로 자신의 소리, 자신의 노래를 인정하는 작곡가의 열정에 감복한 것이다.“물론 국악계에서 이런 저의 활동을 외도라고 보시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외도가 아닙니다. 국악을 떠나는 게 아니라 국악의 매력은 앨범 활동을 통해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거든요.”그녀의 말처럼 실제로 그녀가 낸 앨범은 단순한 성인가요 앨범이 아니라 국악과 양악의 크로스오버 앨범이다. 국악과 양악을 절묘하게 잘 버무린 ‘아리랑 사랑’ 등 3곡의 신곡을 비롯해 그녀 자신의 특기인 ‘닐리리야’ ‘태평가’ ‘창부타령’ 등의 경기민요도 수록돼 있다.“명창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이왕 시작한 거 최선을 다해 성공해 보이고 싶어요. 저를 향해 응원을 보내주신 많은 국악 팬들, 스승님,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 명창 안소라가 표현하는 소리, 노래의 진수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그래서 단순히 앨범을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인가수로서의 활동도 왕성하게 할 작정이다. “그 일환으로 오는 4월 23일 오후 6시 코리아나 호텔에서 팬들과 언론 관계자들을 모시고 음반기념회를 열 예정입니다. 명창으로서의 긍지, 자부심을 안고 신인가수 안소라라로 떳떳이 자리 매김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요즘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은 꼭 소리 연습을 한다는 명창 안소라. 소리와 국악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이 아니라 소리에 대한 열정을 노래로도 표현하고 싶다는 열정을 지닌 명창 안소라의 새로운 이름은 이제 신인가수, 안소라다.약력: 경기민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수자. 1986년 서울 송년 종합예술제 민요부문 최우수상 수상. 1993년~2001년 경기민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이은주 선생 사사. 2001년 전국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 수상. 한국민요 연구회 상임이사. 안소라국악원 원장.김성주 자유기고가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