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남구 동촌동 5.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강공장 내부에선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진다. 마그마처럼 녹은 쇳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강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 표면 온도 섭씨 1000도가 넘는 새빨간 철 덩어리들이 제철소 내부에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초대형 기계를 거칠 때마다 용해된 철은 시시각각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꾼다. 두께 20cm가 넘는 철판 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롤러 사이를 오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철은 바로 197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산업의 쌀’이다. 세계 1위인 조선, 4위인 가전, 6위인 자동차 산업의 세계적 위상은 철강 산업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포항제철소 정문에 내걸린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라는 표어에는 한국 철강 산업의 급성장 비결이 함축돼 있다. 주어진 조건만 본다면 한국은 철강 대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전무했다. 자원은 빈약하고 대규모 시설 투자를 감당할 자본도 부족했다. 창의와 노력, 리더십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 1972년 첫 생산된 열연코일에 박태준 당시 포스코 사장은 감격어린 표정으로 ‘피와 땀의 결정’이라고 썼다.한국의 근대적 철강 산업은 1918년 황해도 송림에 건설된 겸이포제철소에서 출발한다. 일본은 만주 지배를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제철소를 지었다. 이는 광복 이후 남쪽 지역의 철강 공급 절대 부족 현상을 불러왔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났을 때 그나마 있던 산업 시설도 태반이 파괴돼 철강 산업은 빈사 상태였다. 이듬해인 1954년에야 강원도 삼척에 있던 삼화제철소(현 동국제강)가 복구돼 가동되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대한중공업공사(현 현대INI스틸)가 연산 3만6000톤 규모의 50톤급 평로를 순수 국내 자금으로 준공했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부산제철소(현 동국제강) 극동철강 한국철강 시온철강 등이 고철을 재활용하는 전기로 가동을 시작했다.하지만 설비 규모가 영세한 데다 철강 생산의 첫 단계인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제선 과정의 공급이 절대 부족한 불안정한 구조였다. 6·25전쟁 이후 여유가 많았던 고철의 공급도 점차 고갈되는 상태였다. 제선과 제강, 압연을 아우르는 일관제철소 건설 논의가 시작된 배경이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철강 공급이 필수적이다. 철강재를 수입하는데 보유 외환의 대부분을 쓰는 바람에 한국 경제의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경제 자립을 위해서는 자체적인 철강 생산 외에는 길이 없었다.당시 일본은 세계 철강 업계의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일본은 정부의 강력한 철강 산업 지원 정책과 업계의 대대적인 합리화 추진에 힘입어 1950년대 들어서면서 패전의 아픔을 딛고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일본은 고성능 LD전로, 대형 용광로, 연속주조법 등 새로운 철강 기술과 최신 설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산업혁명 이후 세계 철강 시장을 주도해 온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제쳤다. 1970년 일본 철강 산업의 주력 기업이던 야와타제철과 후지제철의 합병으로 탄생한 신일본제철은 20세기 들어 70년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US스틸을 밀어내고 세계 1위 철강 기업으로 부상했다.하지만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 계획은 시작부터 좌절의 연속이었다. 가진 것 없는 아시아 변방 작은 나라에 막대한 제철소 건설 자금을 대줄 나라는 없었다. 애초 일관제철소 건설 방안은 두 가지가 제시됐다. 첫 번째는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에 맞는 소규모 고로로 출발하자는 의견이었다. 국내에서 나는 철광석과 무연탄을 쓰고 삼화제철소 설비 등을 적극 활용, 확대하자는 것이다. 당시 세계시장의 추세로 볼 때 20만~30만 톤 규모가 적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 안은 최소 연산 100만 톤 규모의 대형 고로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기존 자원과 설비에 집착하지 말고 철광석과 유연탄을 수입해 쓰더라도 안정성과 경제성이 입증된 최첨단 설비를 갖추자는 것이다.그 후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포항제철소 건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박태준 당시 포스코 사장은 일본 측이 그려 온 제철소 레이아웃을 보고 화를 버럭 냈다. 200만~300만 톤 규모에 맞춘 배치였다. 박 사장은 도로 등을 그 자리에서 늘려 놓았다. 그는 처음부터 1000만 톤 체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지금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방문하는 세계 철강 업계 관계자들은 이상적인 제철소 레이아웃에 감탄을 터뜨린다. 박 사장의 원대한 비전 덕에 포스코의 두 제철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효율적인 제철소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1950년대 말 이후 지지부진하던 일관제철소 건설 사업은 1965년부터 탄력을 받게 된다. 그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피츠버그 철강 공업 지대를 방문해 미국 철강 산업의 위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당시 피츠버그는 세계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다. 이듬해인 1966년 드디어 미국 코퍼스와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 독일 데마크와 지멘스, 영국 엘만, 이탈리아 임피안티, 프랑스 엥시드 등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출범했다. 하지만 이는 순탄치 않은 과정의 첫 출발에 불과했다.정부는 발 빠르게 종합제철소 입지로 포항을 선정하고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포스코)를 설립했다. 그러나 차관 규모와 구체적인 이행 여부에 대해 확답을 미루던 KISA는 세계은행의 부정적인 보고서를 빌미로 결국 차관 논의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국제 사회에는 한국은 자원이 빈약해 원료 수입을 감당할 수 없고 일본과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는 만큼 자체적으로 철을 생산하는 것보다 수입해 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결국 제철소 부지도 정하고 회사도 설립해 놓았는데 정착 차관 도입이 무산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좀처럼 돌파구가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때 박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쓰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초 한·일 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받는 대일청구권 자금은 농수산업 부문에 쓰기로 돼 있었다. 이를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돌려쓰기로 하자 농촌 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반발이 빗발쳤다. 하지만 정부는 국내외 반대를 무릅쓰고 1969년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 선조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제철소를 짓게 된 것이다. 박 사장은 “제철소 건설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1970년 4월 1일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 1기 설비 공사가 마침내 착공됐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건설 공사였다. 이후 3년 동안 진행된 1기 공사에는 외자 1억7800만 달러, 내자 493억 원 등 총 1204억 원이 투자됐다. 이는 당시 428억 원이 소요된 경부고속도로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이후 1981년 4기 설비 종합 준공 때까지 포항제철소 건설 사업은 규모나 물량, 공사 금액, 기간 등 모든 면에서 사상 초유의 대역사의 연속이었다. 포스코는 주설비 착공 13년 만에 910만 톤 체제의 대단위 제철소를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72년 후판 공장 가동 이후부터는 조업과 건설을 병행하는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매 분기 공기를 단축해 왔다.공기 단축은 단순히 완공 시점을 앞당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공기 단축은 제철소 경쟁력 제고로 직결된다. 포항 1기의 조강 톤당 건설 단가는 251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대만 CSC의 667달러나 일본 오기시마제철소 626달러의 40% 수준이다. 포스코는 설비 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세계 제철소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세계 철강 업계의 상황도 포스코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73년 터진 1차 오일 쇼크는 세계 철강 산업의 지각변동을 가져 왔다. 시장의 주도권은 미국에서 일본과 개도국으로 확실하게 넘어왔다. 미국과 유럽 철강사들은 이후 생산 설비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인 감산에 나섰다. 이는 오일 쇼크에 따른 철강 경기 불황과 함께 공해 발생, 인건비 상승 등 누적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선진국의 감산 움직임은 막 성장하려는 한국 철강 산업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특히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등 설비 업체들의 치열한 수준 경쟁이 벌어지면서 최신 설비를 싼값에 들여올 수 있었다. 전반적인 시장 위축으로 위기감을 느낀 설비 업체들은 포스코를 잡는데 사활을 걸었다.1986년 박태준 회장은 1969년 당시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부정적인 보고서를 내 KISA 활동을 와해시킨 세계은행 실무자를 런던에서 직접 만나 “지금도 그 보고서가 옳다고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실무자는 “현재도 그 보고서가 옳지만 박태준 회장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해 보고서를 틀리게 했다”며 웃었다.1970~80년대 전기로 업체들도 활발한 설비 증설에 나섰다. 이를 통해 이들은 포스코의 일관제철소와 함께 국내 철강 산업의 양대 축을 형성하게 된다. 현재 국내 조강 생산에서 일관제철소의 전로와 전기로 비중은 각각 54%, 46% 수준이다.1993년 한국의 철강 생산은 포스코 광양제철소 준공과 전기로 업체의 설비 증설에 힘입어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독일에 이어 처음 세계 6위로 올라섰다. 개별 기업으로 보면 포스코가 1998년 신일본제철을 제치고 세계 1위 철강 기업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2000년 강원산업과 삼미특수강을 흡수 합병한 현대제철은 미국 뉴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전기로 제강 업체로 올라섰다. 그러나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세계 철강 업계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서서히 밀어닥치기 시작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협찬: PO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