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여름철 땀을 한바탕 흘리고 난 뒤면 어김없이 수돗가로 달려가 친구들과 머리를 적시며 벌컥벌컥 수돗물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돈을 주고 물을 사 먹어야만 하는 시대가 왔다. 그리고 물을 가려 마시는 시대에 맞춰 세계 각지의 물들이 마켓에 쏟아지고 있다. 이제 물은 더 이상 단순히 물의 개념을 넘어서 웰빙 트렌드의 주요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피트니스 클럽에 가면 늘씬한 미녀들과 소위 ‘몸짱’이라고 하는 남성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멋진 트랙 슈트를 차려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제각기 물병들을 쥐고 있다. 여기서 물은 단순히 목을 축이기 위한 물이 아니라 세련되고 시크한 헬스 액세서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이 쥐고 운동하고 있는 물은 ‘난 이런 물을 마시는 사람이야’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패션 소품인 것이다.수입 생수들의 비중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국내 음료 시장에서도 혼합차를 비롯해 갖가지 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30대를 타깃으로 하는 음료 시장을 보면 하나같이 이 제품을 마시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고 광고에 나오는 모델처럼 날씬해질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녀의 가방엔 뭐가 들었을까?’라는 광고 카피가 나오고 결국 그녀의 몸매 유지와 미모의 비결은 바로 그녀가 마시는 물이라는 식의 광고 말이다.물이 패션 아이템화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일례로 워터바(Water-Bar)를 들 수 있는데 지난해 11월 서울 삼성동 선릉공원 옆에 ‘노 트랜스 워터 카페’가 처음 들어선 이후 올해도 지속적으로 강남권을 중심으로 워터바가 늘어나고 있다.이는 마치 패션 멀티숍(multi-shop)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패션에서의 멀티숍 열풍은 이미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백화점에서 여러 디자이너의 옷들을 만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물 또한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수입 생수만 해도 40~50여 종에 이른다.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현대백화점 본점, 갤러리아 명품관 웨스트 등은 2006년부터 수입 생수 코너와 각종 이벤트 코너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다양한 아이템의 물들을 판매하고 있다.또한 고객들이 좀 더 편안하게 쇼핑하도록 하기 위해 백화점에 퍼스널 쇼퍼가 등장했듯이 워터바에는 나만의 물을 추천해 주는 워터 소믈리에가 등장했다. 이렇듯 패션 아이템화되고 있는 물은 패션 시장이 만들어 놓은 순서를 그대로 답습이라도 하듯이 유통망까지 닮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이밖에도 워터바(Water-Bar)를 비롯해 강남권 일대 고급 요가 센터나 피트니스 클럽, 아트 갤러리 등에서도 페리에(Perrier), 에비앙(Evian), 시에(Siana), 콘트랙스(Contrax) 등과 같은 프리미엄 워터들을 배치해 이미지 메이킹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카페에서도 커피나 과일 음료보다 미네랄 워터를 주문해 마시는 트렌드가 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웰빙 개념을 넘어 물의 기능이 이미지 메이킹의 수단으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이렇듯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으로 무장한 물들. 어떤 물을 마시는 것이 건강과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필자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는 대목에서 독자들의 건강에 맞는 물은 어느 것이며 어느 상황에 어떤 물을 선택해야 센스 있는 남자가 될 수 있는지 알기 쉽게 힌트를 제공하고자 한다.△= 지구의 3분의 2를 뒤덮고 있는 바닷물은 지구를 돌고 돌다 그린란드 빙하 지역에서 급속히 차가워진다. 온도가 낮아지면서 비중이 높아진 바닷물은 수심 200m 이하로 내려가 지구 곳곳을 천천히 돌다가 북태평양에서 다시 냉각돼 하강한다. 이런 해양 심층수에는 마그네슘, 칼륨, 나트륨 등의 미네랄과 영양 염류 등이 일반 생수에 비해 풍부하다. 정제를 통해 염도는 거의 없으나 어딘가 모르게 바다 냄새를 풍기고 있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일본의 마린 파워(Marine Power)와 국내에는 울릉 미네 워터 등이 있는데, 이렇게 묵직하면서 담담한 성격의 물인 해양 심층수를 마실 때에는 깔끔하고 댄디한 룩의 버버리(Burberry) 트렌치코트에 발리(Bally) 브리프 케이스, 쥬드 로(Jude Law)의 댄디한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던힐(Dunhill)의 구두를 매치하면 물맛만큼이나 깔끔하고 멋진 댄디룩을 완성할 수 있다.△=실질적으로 빙하수와 심층수의 차이는 크지 않다. 빙하가 녹아 해양의 심층으로 스며들어 가면 해양 심층수가 되고 산맥과 같은 지질에 스며들어가면 일반 심층수가 되는 것이다. 효능은 심층수와 비슷하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여러 셀러브리티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 물 에비앙이 있으며 캐나다의 휘슬러(Whistler), 에콰도르의 빌카구아(Vilcagua)라는 브랜드가 있다. 차가운 빙하의 시원함과 어울릴 만한 패션으로는 시크한 옷차림이 좋다. 질샌더(Jilsander)의 깔끔한 재킷에 시크함의 대명사인 프라다(Prada)의 팬츠와 구두를 매치해도 아주 멋스러울 것이다.△= 대표적인 화산 암반수로는 국내의 제주 삼다수를 들 수 있는데, 지층 구조가 화산회토(화산재)와 다공질 현무암, 조면 암층 등으로 돼 있어 빗물이 지하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여과돼 보통 생수 회사의 정수 시스템과 맞먹을 정도다. 과망간산칼륨과 질산성 질소 같은 물질이 많이 들어 있어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이 장점이다. 건강에도 좋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나는 화산 암반수를 마실 경우에는 고고하지만 클래식한 의상들을 매치하면 그 분위기 또한 배가될 것이다. 클래식 룩의 대명사인 지방시(Givenchy)의 화이트 셔츠에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의 격조 있는 슈트를 입고 해양 심층수를 마신다면 얼마나 멋스럽겠는가.= 말 그대로 물의 탄산이 녹아 있는 경우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프랑스의 역사 깊은 천연탄산 음료 페리에와 이탈리아의 산펠레그리노(San Pellegrino), 프랑스의 주벙스(Jouvance) 등이 있다. 산펠레그리노는 톰 크루즈, 마돈나 등 할리우드 스타들에게서 톡 쏘는 맛으로 사랑 받고 있는 브랜드이며, 프랑스의 페리에는 프랑스 남부 베르게즈에서 나는 천연 탄산수로 한니발 장군이 로마군을 물리친 뒤 이 물로 축배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물이다. 필자는 항상 페리에를 즐겨 마시는데 다른 탄산수와의 차이점은 이산화탄소 함량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물과 이산화탄소를 따로 추출해 담는다는 것이다.특히 맛 또한 플레인, 레몬, 라임 세 가지 종류로 구분돼 있어 밝게 입고 싶을 때나 개성 있게 입고 싶을 때, 또는 트렌디해 보이고 싶을 때 상황에 맞게 음료의 맛과 옷을 맞춰 입기도 한다. 이렇게 산뜻하고 톡톡 튀는 탄산수의 버블은 트렌디한 옷들과 잘 맞는다. 필자도 개성 있게 입고 싶은 거나 파티가 있는 날이면 디젤(Disel)의 청바지에 닐 바렛(Neilbarrett) 재킷을 걸쳐 입고 페리에를 마시곤 한다. 샴페인을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페리에가 낮에 즐기는 무알코올 샴페인인 셈이다.여러 가지의 드레스 코드가 있는 것처럼 이제는 때와 상황에 맞게 어떤 물을 마시는지가 관건이다. 이제는 한국 남자들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물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글로벌 넘버원’ 격인 탄산수 음료 페리에와 생수업체 에비앙이 100년 넘도록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그 브랜드들의 성공 비결을 단순히 건강에 좋은 탄산수라는, 천연 미네랄 생수라는 제품력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가장 핵심적인 성공 요인은 브랜드에 꿈과 이야기를 담아, 제품 이미지를 타 브랜드와 차별화한데 있다. 사실 물은 맛, 향과 같은 제품의 특성만을 통해 차별화하기가 어려운 상품이기 때문이다.음료를 많이 마시는 여름이 돌아왔다. 여름철에 센스 있게 차려 입는 것도, 피서지에서 단련된 몸을 멋지게 자랑하는 것 또한 좋다.그러나 진정한 멋진 남자라면 내가 마시는 음료가 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온 지금, 이제는 물 가려 마시는 남자가 ‘물’ 좋은 남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름철에 필수 아이템인 나에게 알맞은 물 선택으로 자신을 표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인스턴트 차, 건강에 좋지 않은 탄산음료들이 아닌 100%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물로 말이다.1994년 호주 매쿼리대학 졸업. 95~96년 닥터마틴·스톰 마케팅. 2001년 홍보대행사 오피스에이치 설립. 각종 패션지 지큐·앙앙·바자 등에 칼럼 기고. 저서에 샴페인 에세이 ‘250,000,000버블 by 샴페인맨’이 있음.황의건·오피스에이치 대표이사 h@office-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