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한여름에 접어든 과천 정부 청사에 때늦은 봄바람이 불고 있다. 정권 초만 해도 관료들은 새 정부에서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른바 ‘머슴론’에 잔뜩 위축된 공무원들을 청와대는 ‘월화수목금금금’ 노 홀리데이로 몰아붙이고 ‘얼리버드’가 될 것을 강요했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청와대 지침에 맞춰 정책을 개발해 내는 기계냐”는 볼멘소리까지 터져 나올 정도였다.그랬던 관료 사회가 최근 다시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청와대 2기 참모진에서 경제 관료 출신인 박병원 경제수석이 ‘구원투수’로 중용된 것이 신호탄이었다. 쇠고기 파동을 겪은 뒤 청와대가 관료들을 보는 시선은 180도 달라졌다.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국정의 동반자’로 승격된 것이다. 이 대통령이 최근 고위 공직자와의 대화에서 “개발 시대나 지금이나 공무원이 항상 중심”이라고 치켜세운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2기 청와대 비서진에는 박 경제수석을 비롯해 정동기(민정수석) 김성환(외교안보수석) 강윤구(사회수석) 등 관료 출신이 대거 포진했다. 교수 출신이 절대 다수를 점했던 1기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인사 문제로 시끄러울 땐 관료를 쓰는 게 안전하다”는 속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강부자’ ‘고소영’ 오명을 벗기 위해 청와대가 선택한 것은 결국 관료들이었다. 1급 이상 고위 관료라면 어느 정도 검증을 통과한 인물로만 구성돼 있다는 점은 관료들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 등 실무에 밝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일을 할 공무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도 업무 효율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다.과천청사에서 근무하는 경제 부처 관료들은 이 같은 청와대의 기류 변화에 안도하는 분위기다. 한 경제 부처 관료는 “과거 노무현 정부 때도 집권 세력이 초반에는 관료들과 맞섰지만 결국엔 공무원들을 잘 활용했을 때 뜻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었다”며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파동과 대내·외적인 경제 여건 악화 등으로 악재가 겹쳐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과장급 공무원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영혼이 없다’는 말이 회자되는 등 공무원을 폄훼하는 분위기 때문에 공직 사회는 사실 속부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며 “관료들의 가치가 재평가되는 것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할 땐 다행”이라고 평가했다.공기업 인사에서는 ‘공무원 배제 원칙’에 밀려 고배를 마시던 관료 출신들이 화려한 부활을 하고 있다. 행정고시 14회로 옛 산업자원부 차관을 지낸 조환익 전 수출보험공사 사장이 KOTRA 사장에 지원했다고 밝혔을 때만 해도 과천에는 “과연 될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KOTRA 사장 자리는 재공모를 거듭한 끝에 조 사장의 차지가 됐다. 수출입은행장에는 진동수 전 재정경제부 2차관이 임명됐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에는 역시 재경부 관료 출신의 진영욱 한화손보 부회장이 꿰찼다.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맞춰 통폐합 수순을 밟고 있는 주택공사와 토지공사의 사장에는 각각 최재덕 전 건설교통부 차관(행시 18회)과 이종상 전 서울특별시청 균형발전본부장(기술고시 13회)이 선임됐다. 내부 출신이나 민간 최고경영자(CEO)를 앉히는 것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협조를 구하기 쉬울 것이란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산업자원부 국장을 거쳐 특허청 차장으로 물러난 이태용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행시 22회), 정준석 신임 부품소재진흥원장(행시 19회)도 관료 출신으로 공기업에 안착했다.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24일까지 신규 선임된 85명의 공기업 사장 중 29명이 관료 출신인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의 34.1%로 교수·연구원(30.6%), 기업·금융인(10.6%) 등에 비해 비중이 월등히 높다. 공직 사회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과 함께 이명박 정부 들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전관 예우’나 ‘낙하산 인사’ 시비도 다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들로서는 반갑지 않은 논란이다.차기현·한국경제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