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지는 스태그플레이션 그림자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규슈에 있는 ‘도요타자동차 규슈’ 공장의 계약직 사원 800명을 최근 해고했다. 렉서스 스포츠 유틸리티(SUV) 라인과 고급 살롱을 수출하고 있는 규슈 공장에서는 지난 6월 초 350명을 해고한 데 이어 8월 들어서도 450명가량의 계약직을 추가 해고했다. 일본 내 자동차 생산량의 60% 이상을 수출하고 있는 도요타가 북미 시장 침체로 감산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렉서스는 1989년 등장한 ‘마크’ 모델 이후 선보인 야심작으로 초기에는 북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유가 급등과 경기 둔화로 소비자들이 연비 좋은 소형차를 선호하면서 지난 7월 렉서스 판매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 25%나 급감했다. 렉서스가 도요타의 애물단지가 됐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도요타는 북미 시장 수출 침체와 엔화 강세 등 여파로 올 2분기(4~6월) 영업이익이 4125억 엔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9% 줄어든 것. 순이익은 3536억 엔으로 28.0% 감소했다. 도요타의 분기별 순익이 하락세로 돌아선 것은 4분기 만에 처음이다.일본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지난 2002년 초 이후 6년 이상 지속돼 온 경기 상승 국면이 미국 경기 침체와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고 흔들리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경기 하강을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경기 둔화에 물가는 가파르게 올라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마저 나온다.그러나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 경제가 과잉 설비, 과잉 고용 등 거품을 걷어내고 자생력을 갖춘 만큼 경기 하락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없지 않다.최근 일본 경제는 지표상 뚜렷한 하강세를 보였다. 지난 2분기 일본 경제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에 비해 0.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2분기 이후 1년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이다. 1년치 연율로 환산하면 마이너스 2.4%다.지난 2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그동안 일본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온 수출이 부진했던 데다, 물가 상승으로 내수의 핵심인 개인 소비마저 감소했기 때문이다. GDP의 6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개인 소비는 전 분기에 비해 0.5%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개인 소비 감소는 2006년 3분기 이후 7분기 만이다.이는 경기가 후퇴 국면에 진입했다고 일본 정부가 최근 밝힌 것을 뒷받침하는 통계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정부는 경기 하강을 공식으로 인정하고 지난 6년간 이어졌던 성장세가 막을 내렸다고 선언했다. 일본 정부는 8월 7일 발표한 월간 경제 보고서에서 4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경기 회복’이란 표현을 뺐다. 이와 함께 2001년 4월 이후 처음으로 ‘경기 약화’란 표현을 사용했다.일본은 미국 등과 마찬가지로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할 경우 침체로 분류한다. 일본 내 상당수 이코노미스트들은 일본이 이미 침체에 빠졌거나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의 월간 경제 보고서는 “미국 경기 둔화와 증시·외환시장 저조, 고유가로 인해 경기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며 “경기 악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내각부의 니시자키 후미히라 거시경제국장은 “일본이 침체에 빠졌다고 정부가 판단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오랫동안 지속돼 온 ‘이자나기 회복세’가 끝난 것만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노린추킨 리서치인스티튜트의 이코노미스트 미나미 다케시도 “수출이 줄고 기업 수익도 좋지 않기 때문에 향후 기업 투자가 더 나빠질 것으로 보인다”며 “적어도 연말까지는 경기가 악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경기 하강 속에 물가는 뛰고 있다. 일본은행이 8월 12일 발표한 7월 중 생산자 물가는 전년 동월에 비해 7.1% 올랐다. 제2차 오일 쇼크의 악재가 지속된 1981년 1월(8.1%) 이후 2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골드만삭스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에선 식료품은 물론 철강재와 화학 제품을 포함한 거의 모든 제품의 가격이 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밀가루와 식용유 설탕 등 기초생필품 값은 최근 5∼10% 올랐다. 20여년간 변화가 없던 교통요금과 전기료 가스료 등도 줄줄이 인상을 기다리고 있다.급등한 생산자 물가는 기업들의 이익을 감소시켜 임금 삭감과 제품 가격 인상을 유발, 소비 지출을 더 얼어붙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도쿄 소재 로열스코틀랜드은행(RBS)의 야마자키 마모루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경제가 지금 추세대로 물가가 계속 오르고 경기가 둔화되면 스태그플레이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고 말했다.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에 대응해 이달 말 중소·영세기업 금융 지원들을 골자로 한 종합경기부양책 마련에 착수했다. 일본 정부와 여당인 자민당은 최근 당정협의회를 열고 경기 대책의 기본 골격에 대해 논의했다. 대책은 8월 말 발표될 예정이다.일본 정부가 검토 중인 대책은 원자재 가격 상승과 경기 둔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영세기업과 운수업자, 비정규직 근로자 등 서민에 대한 지원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중소·영세기업에 대해선 정부계 금융 회사를 통해 저리 융자를 확대하고 신용 보증도 늘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또 연료비 급등으로 애로를 겪는 업종의 기업에 대해서는 에너지 절약 설비를 도입할 때 자금을 지원하거나 에너지 절약 설비 도입을 조건으로 연료비 상승분을 정부가 보전해 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서민 생활 안정과 관련,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해 직업 교육을 강화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도 포함될 예상이다.그러나 여당 측이 요구하고 있는 고속도로 요금 인하나 주식 투자자에 대한 배당 소득세 감면 등은 포함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재정 부담이 큰 지원책들이어서 정부가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는 당초 “재정에 큰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국민들의 생활 안정에 도움이 되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내각에 지시했었다.이 때문에 일각에선 정부가 감세 등 재정 지원을 최소화한 국지적인 방안 위주로 대책을 마련할 경우 실효성이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또 금년 말이나 내년 초로 예상되는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를 의식해 공동 여당인 공명당은 대부분의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액 감세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있어 논란도 예상된다.그러나 일본의 경기 둔화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없지는 않다. 이번 경기 하강은 북미 시장 수출 부진과 신흥시장 인플레이션 압박 등 주로 외부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만큼 부동산 버블 붕괴에 따른 1990년대 경기 침체처럼 장기화되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일본 기업들의 재무 건전성이 좋아진 데다 국제 유가가 최근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긍정적이다.니혼게이자이신문이 미쓰이스미토모애셋매니지먼트 등 민간연구소 5곳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일본 경기는 지난해 10~12월 정점을 통과했으며 회복 시기는 내년 1분기 이후로 내다본 응답이 가장 많았다. 노무라증권의 다카히데 기우치 선임 전략가는 “가계 소비와 주택 투자, 자본 지출 등 핵심 지표들이 모두 부진한 모습”이라면서도 “경기 침체가 추세로 굳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클레이즈캐피털의 모리가 조타로 선임 전략가도 “최근 유가가 하락하고 있어 일본 경제에 대한 부정적 요인들이 줄어들고 있다”며 “2분기 성장률은 바닥으로 내년부터 꾸준한 성장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한편 재무성이 이날 발표한 국제수지 속보에 따르면 금년 상반기 일본의 경상수지흑자액은 전년 동기에 비해 15.9% 감소한 10조4558억 엔(약 100조3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2005년 하반기 이후 2년 6개월 만에 하락세로 꺾인 것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