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투자 기회 잡아라

금융 회사는 리스크를 먹고 산다. 리스크가 없는 곳에는 수익도 없다. 큰돈을 벌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정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또한 리스크 평가는 상대적일 수 있다. 모든 금융 회사가 외면한 기업도 안을 들여다보면 알짜 기업인 경우가 있다. 이런 기업 투자하는 것은 밖에서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로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핵심은 기업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분석 능력이다. 금융 회사의 진짜 실력은 바로 여기서 갈린다. 벌처펀드는 이런 게임의 고수들이다.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찾아내 고수익을 올린다.1997년 외환위기 후 리스크를 둘러싸고 엇갈린 금융 회사들의 운명은 흥미롭다. 진로그룹이 부도나자 은행들은 진로 채권을 앞 다퉈 헐값에 매각했다. 한 푼이라도 건지자는 태도였다. 물론 유동성 확보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던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 진로 채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리스크 감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채권은 한국자산관리공사를 거쳐 골드만삭스 등 외국계 벌처 투자가들 손에 들어갔다. 액면가 19%의 헐값이었다. 골드만삭스 등 벌처 투자가들은 이 투자로 수조 원의 수익을 올렸다. 만약 국내 은행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진로 채권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유사한 사례를 수없이 많다. 극동건설 외환은행 한미은행 제일은행 만도기계 무학소주도 마찬가지다. 국내 은행들 간에도 희비는 엇갈렸다. 외환위기 후 진행된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서울보증보험은 정부의 정책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부실기업을 상당수 떠안았다. 그런데 경기가 좋아지고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그 기업들이 대박을 안겨 줬다. 반면 ‘관치금융’을 비판하며 워크아웃에 동참하지 않은 몇몇 은행들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돈을 날린 셈이 됐다. LG카드(현 신한카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지난 2003년 LG그룹은 출자 전환에 참여해 달라는 LG카드 채권단의 요구를 뿌리치고 말았다. LG그룹이 적극적으로 투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06년 신한금융지주는 LG카드를 인수하기 위해 7조 원에 가까운 거액을 적어냈다.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사장은 “이제는 기업 리스크에 대한 분석 능력이 최고의 자산인 시대”라고 말한다. 기업이 직면한 리스크는 크게 재무 리스크와 사업 리스크로 나눌 수 있다. 재무 리스크와 사업 리스크가 모두 낮은 기업은 우량 기업이다. 반대로 이 두 가지가 모두 높은 기업은 파산 기업이다.이 중 벌처 투자의 타깃은 파산 기업과 채무 구조조정 기업, 사업 구조조정 기업이다. 문제가 어느 정도 밖으로 드러난 기업들이다. 과거 금융 회사는 정상 기업만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직후 국내 시장을 싹쓸이한 외국 벌처펀드들을 통해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문제 기업도 돈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미국발 금융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벌처 투자의 시대가 예고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벌처펀드 조성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업계에서는 이미 새로운 투자 기회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고 있다. 그동안 쌓은 실력을 선보일 차례다.하지만 벌처 투자는 사모 투자 펀드(PEF)나 몇몇 투자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사장은 “지금 금융 회사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벌처 투자 마인드”라고 강조한다. 벌처 투자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에도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벌처 투자 방식의 유동성 기원은 금융 회사와 중소기업의 ‘윈윈’을 가능하게 해준다. 대출을 전환하거나 연장할 때 전환사채(CB)로 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회생해 수익을 내면 은행은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 전환사채 대신 신주인수권부사채(BW)나 전환사채를 인수할 수 있는 옵션을 주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 사장은 “대출 이자율을 고정할 게 아니라 이익과 연동하는 것도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핵심은 은행이 중소기업을 무조건 지원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내면 과실을 나눌 수 있는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다.물론 벌처 투자의 대상을 국내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한국의 부실채권 정리 노하우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사태가 터진 이후 한국자산관리공사는 미국 ‘본토 공략’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그동안 메릴린치가 보유한 부실채권 인수를 검토해 왔다.중국도 빼놓을 수 없는 시장이다. 외국 금융 회사들은 중국의 부실채권 규모를 9110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부실채권 시장인 셈이다. 국영기업과 국영은행들에 내재된 부실채권은 중국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지난해 말 중국 동방자산관리공사로부터 1300억 원 규모의 부실채권을 인수했다. 이정조(55) 사장은 1995년 리스크컨설팅코리아를 창업하면서 ‘3대 신화의 붕괴’를 예견해 주목을 끌었다. ‘금융 회사는 망하지 않는다’ ‘큰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대마불사)’ ‘담보가 가장 안전하다’ 등이 그것이다. 그의 예언은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거짓말처럼 현실이 됐다. 금융 회사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대마불사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또 신용이 담보보다 안전할 수 있다. 이 사장은 “새로운 구조조정의 시대가 오고 있다”며 “벌처 투자의 활성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금융 위기는 빠른 속도로 실물 위기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수출 기업은 당장 대미 수출 시장이 막힌다. 국내에서도 소비와 생산이 감소한다. 이런 영향들이 기업에 치명타를 입힐 것이다. 이제부터는 실물로 오는 이런 위험을 어떻게 차단하느냐가 중요하다. 벌처 투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민간이 벌처 투자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과거 벤처산업을 육성할 때 투자 금액의 10%를 세액공제해 줬다. 지금도 어렵기는 그때와 마찬가지다. 신규 자금으로 벌처 투자를 하는 사람은 세액공제를 해줘야 한다.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기금도 일정 부분 보증을 해 줘야 한다.금융 회사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똑같은 생선을 갖고 고수익이라는 차별화된 맛을 내는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기회다. 우리 금융 회사들의 능력은 이제 어디에서도 뒤지지 않는다. 외환 위기 이후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배우고 경험했다. 그동안 배워 온 실력으로 기업을 도우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지금 국내 전체를 통틀어 유동성이 제일 좋은 곳은 대기업이다. 더구나 납품 업체에 대해 금융 회사보다 훨씬 속속들이 알고 있다. 어려움을 겪은 납품 업체에 벌처 투자를 하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대기업에 억지로 중소기업과 상생 협력하라고 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법인세 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면 대기업들에도 이득이 된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