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사례

벌처펀드 내지는 구조조정 펀드의 국내 사례는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국내 기업에 투자한 해외 자본 △국내 기업에 투자한 국내 자본 △해외 기업에 투자한 국내 자본이다. 투자 액수의 규모로 보면 위 순서대로 이뤄진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국내에서도 CRC(Corporate Restructuring Company)조합 및 회사가 설립돼 부실기업에 대한 투자가 이뤄졌지만 이들 총액을 합해도 해외 자본이 국내 기업 한 개를 인수하는 가격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부실기업에 투자한다는 것도 아직은 초보 단계에 와 있다.국내 부실기업에 투자한 해외 자본의 사례는 외환은행은 인수했던 론스타, 진로의 부실채권을 인수했던 골드만삭스, 만도기계의 칼라일 펀드, 이랜드월드의 와버그핀커스, 제일은행의 뉴브리지캐피탈, 굿모닝증권(옛 쌍용증권)의 H&Q와 IFC 등 한 번쯤은 들어본 것들이다.외환은행의 경우 현재 51%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대주주는 ‘LSF-KEB 홀딩스(Holdings), SCA’다. 외환은행(Korea Exchange Bank: KEB)을 인수하기 위해 론스타가 모집한 펀드(Lone Star Fund: LSF)를 자본금으로 삼아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드는 방식이다. 국내에 들어온 외국 자본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펀드를 조성해 부실기업을 인수했다. 은행이 망해선 안 된다는 정부의 의지와 자금 조달이 시급한 금융 회사의 위기 상황에서 국내 기업을 인수한 벌처펀드의 수익률은 웬만한 펀드 수익률을 웃돈다.2003년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할 당시 투자 원금은 2조1548억 원. 그간의 배당금으로 6000억 원대의 수익을 올렸고 일부 지분 매각 등을 합하면 투자 원금의 85.4%에 해당하는 1조8399억 원을 이미 회수했다. 나머지 지분 51%를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분할 매도하더라도 2조9000억 원(주당 8800원 기준)가량을 더 벌어들일 것으로 보인다. 지금처럼 금융 위기가 없을 때 조기에 매각했더라면 4조 원이 넘는 추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그렇지만 국내 여론이 적대적으로 형성되고 세금 추징 논란 및 헐값 매각 의혹 등 펀드의 투자 회수(exit)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국내에 들어온 해외 벌처펀드들은 기업의 정상화보다는 수익을 뽑아내는 것에 치중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2000년 칼라일의 한미은행 인수 당시 금융 회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금융위로부터 매각 신청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6개월 뒤 JP모건과 파트너십을 맺어 인수에 성공했지만, 대부분 칼라일의 지배하에 있는 펀드들이어서 대주주 자격 심사를 편법으로 통과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대주주의 고율 배당도 문제로 지적된다.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는 1999년 서울증권을 인수한 후 2002년 액면가의 60%에 해당하는 고율 배당을 실시했다. 호주계 파마펀드가 대주주였던 메리츠증권은 2003년도 순이익이 3억 원에 불과했지만 배당금은 15배인 50억 원을 지급했다.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을 겪었던 SK(주)의 경우에도 2003년 순이익의 6배가 넘는 961억 원을 배당금으로 지급했다.부실기업 소유의 부동산 등 자산을 매각해 수익을 회수하는 것도 벌처펀드의 속성으로 지적된다. 2003년 4월 론스타는 법정관리 하의 극동건설을 1476억 원에 인수했다. 2706억 원에 인수한다고 했지만 인수 당시 극동건설의 보유 현금 1230억 원으로 론스타 보유 회사채를 상환했다. 그해 10월 론스타는 극동빌딩을 1583억 원에 매각해 현금을 확보한 후 12월에 유상감자를 통해 650억 원, 고액 배당(배당성향 25%)으로 240억 원을 회수했다. 회사 내 자산과 수익을 통해 얻은 이득을 합하면 인수가를 상회한다.국내 부실기업 인수는 CRC회사·조합들이 담당하고 있다. 부실기업의 가치가 낮아졌을 때 투자해 정상화된 후 매각해 수익을 얻는 것은 벌처펀드와 같은 개념이지만 벌처펀드가 사모 펀드(PEF)인 반면 CRC회사·조합은 법령에 따른 회사 또는 조합이라는 차이가 있다. 또 국내 CRC회사·조합의 투자는 자본금이 작은 국내 중소기업 위주로 이뤄지고 있어 해외 벌처펀드와 직접 비교는 무리다.한시적인 제도로 시작된 CRC는 내년 5월 없어지고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른 ‘구조개선 PEF’가 이를 대체하게 된다. 금융위는 CRC 제도의 유지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운영 주체를 굳이 CRC회사·조합으로 한정하지 않고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른 일반 금융사가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미 2004년 국내에도 PEF 제도가 도입돼 있기 때문에 벌처펀드와 같은 개념의 펀드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다. 그러나 2008년 6월 말 기준으로 신설 법인은 2만7362개인 반면 부도 법인은 828개로 창업배율이 33배나 되고 부채비율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부채비율이 106.5(2007년 말 기준)로 구조조정 시장이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제 혜택이 없는 PEF에 얼마나 자금이 모일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2008년 6월 현재 지식경제부에 등록된 CRC 회사는 59개로 총 납입자본금은 2조5210억 원이다. 납입자본금 상위 3개사가 전체의 44%를 차지하고 있는데, 순서대로 현대캐피탈(4997억 원) 산은캐피탈(3109억 원) KTB캐피탈(3016억 원)이다. 옛 KTB네트워크에서 하던 CRC 투자는 KTB네트워크가 올해 8월 KTB투자증권으로 변신하면서 KTB캐피탈로 이전된 것이다.KTB네트워크의 2001년 현대큐리텔 투자는 국내 자본의 대기업 인수 시장 참여 활성화 계기가 된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 하이닉스반도체는 2001년 5월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업을 현대큐리텔로 분사했고 같은 해 11월 KTB네트워크가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 KTB네트워크는 인수 대금 443억 원 조성을 위해 블라인드 펀드(투자처를 정하지 않은 펀드) 21%, 프로젝트 펀드 59%, 우리사주 20%로 컨소시엄을 조성했다.이후 팬택과 박병엽 부회장은 2002년 8월 KTB구조조정조합으로부터 현대큐리텔의 지분 50.6%를 인수해 사명을 ‘팬택앤큐리텔’로 변경했다. 이후 KTB네크워크는 2004년까지 상당지분을 매각했다. KTB네트워크의 현대큐리텔 투자에 대한 내부수익률은 160%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국내 자본의 해외 부실기업 투자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는 부실기업 투자 노하우를 바탕으로 중국 부실채권 투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부실 자산 규모는 2006년 약 190조 원 규모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실 자산시장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지난해 12월 중국 동방자산관리공사로부터 약 11억 위안(약 2100억 원), 156개 기업의 담보부 부실 자산을 인수했다. 실제 인수 가격은 자산별로 약 20~40% 수준으로 동방자산관리공사의 자회사인 동방안유유한공사를 활용해 매입한 부실 자산을 2년 내에 회수할 계획이다.지난 7월 이철휘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은 미국 부실채권 시장에 적극 진출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시장의 본격 진출이 예상되기도 했었으나 최근 “아직 투자할 시기가 아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산업은행의 메릴린치 인수 무산에서도 봤듯 미국의 금융 위기가 끝나기 전까진 국내 자본의 미국 부실기업 인수는 당분간 관망세를 취할 조짐이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