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

한국 경제가 늙어가고 있다. 한경비즈니스가 매년 발표하는 ‘한국의 100대 기업’ 가운데 1990년 이후 설립된 것은 6개뿐이다. 그나마 2000년 이후 만들어진 기업은 단 한 곳에 불과하다. 과거 선배 세대가 쌓아놓은 유산만 파먹고 있는 셈이다. 바로 전형적인 ‘올드 이코노미’의 징후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이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국민소득 2만 달러, 3만 달러 경제로 가려면 기업가 정신의 부활은 필수조건이다.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기업가 정신이 전 분야로 확산되는 ‘기업가적 사회(entrepreneurial society)’의 도래를 예고한다.“기업가 정신을 다시 살린다고요? 반가운 일이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연세대 창업 동아리 연세벤처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박인(23·여) 씨는 ‘기업가 정신’이라는 말에 당혹감부터 나타냈다. 연세벤처의 최근 상황을 보면 이런 반응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96년 탄생해 규모나 전통에서 손꼽히는 대학생 창업 동아리인 연세벤처는 매학기 20명 이상 뽑아오던 신입 회원을 지난해에는 다 채우지 못했다. 1학기에 15명, 2학기에 14명을 뽑는데 그쳤다. 박 씨는 “선배들로부터 예전에는 지원자가 많아 굉장히 까다롭게 면접시험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관심 있는 사람은 다 회원으로 받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이처럼 연세벤처의 신입 회원이 줄어든 것은 캠퍼스의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학생들은 모험과 도전보다는 안정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둔다. 박 씨는 “고시를 준비하거나 공인회계사(CPA), 국제재무설계사(CFP) 같은 자격증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창업에 도전한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박 씨는 “창업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부모님의 반대는 물론이고 친구들의 ‘별종’ 취급도 감수해야 한다.하지만 박 씨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는 “안정도 좋지만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다”며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도전하는 소수는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경영학과 4학년인 박 씨는 지난해 한국소셜벤처대회에서 한국 전래 놀이를 영어로 가르치는 아이디어로 1등상을 수상하고 최근 연세창업센터에 입주해 본격적인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박 씨는 “기업가 정신 활성화가 피부에 와 닿는 정책으로 구체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대학생 벤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는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창업 동아리인 ‘서울대 학생 벤처 네트워크’에 따르면 지난해 학부생 창업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 동아리는 지난 12년 동안 20개의 기업을 배출해 왔다. 고려대의 창업 동아리인 ‘젊음과 미래’는 회원을 뽑지 못해 아예 활동을 중단했다. 가물에 콩 나듯 나오는 창업 사례도 교육 콘텐츠나 커피숍 같은 서비스 분야에만 집중돼 기술 벤처는 찾아보기 어렵다.한마디로 대학생 창업은 고사 직전이다. 이는 젊은이들의 모험심과 도전 정신을 키우기 위해 학생 창업 지원에 아낌없이 자원을 쏟아 붓고 있는 선진국들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혁신 기업의 대명사가 된 구글도 불과 10여 년 전인 1998년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의기투합해 창업한 것이다. 반면 기업가 정신의 새로운 진원지가 되어야 할 한국의 대학가는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이는 기업 생태계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영학자들은 기업에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순환 사이클이 있다고 보고 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새롭게 진입하는 신설 기업과 중견 기업, 성숙 단계의 거대 기업 등이 조화를 이룰 때 그 나라 경제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혁신 기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면 경제 전체의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미래의 성장 엔진이 부재한 ‘올드 이코노미’ 현상이다. 해외 언론들은 벌써부터 ‘한국의 때 이른 중년의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기업을 창업 연도를 기준으로 분석해 보면 그 결과는 충격적이다. 한경비즈니스는 시가총액, 매출액, 당기순이익을 잣대로 매년 ‘한국의 100대 기업’을 선정하고 있다. 지난해 발표된 100대 기업 중 1990년 이후 설립된 곳은 6개에 불과했다. 범위를 2000년 이후로 좁히면 해당 기업의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든다. 100대 기업 중 2000년 이후 창업한 곳은 단 한 곳뿐이다.한국의 100대 기업 중 설립 연도가 1949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곳은 모두 14개다. 1896년 탄생한 박승직상점(현 두산)과 1899년 만들어진 대한천일은행(현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대한통운(1930년), 하이트맥주(1933년),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1937년), 한국타이어(1941년)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1950년대에는 현대건설(1950년), 삼성물산(1952년), 한국화약(현 한화, 1952년), 금성사(현 LG전자, 1958년) 등 주요 대기업의 모태가 된 기업들이 집중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100대 기업 중 1950년대 설립된 기업은 13개다. 이어진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 기업의 전성기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100대 기업 대부분이 1960년대(30개), 1970년대(25개)에 탄생했다.그러나 1980년대 들어 극적인 반전이 나타난다. 100대 기업 중 1980년대 만들어진 곳은 12개로 크게 줄어든다. 1970년대 25개에 견줘 절반도 못되는 수준이다. 1990년대 그나마 5개로 또다시 급락한다. LG텔레콤(1996년), KTF(1997년), 강원랜드(1998년), NHN(1999년), 미래에셋증권(1999년) 등이 1990년대 새로 문을 연 기업들이다.2000년 이후 설립 기업은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100대 기업 중 외형상 2000년 이후 신설 법인은 16개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딴판이다. 대부분이 지주회사 전환이나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회사를 쪼개거나 합하는 과정에서 신설 형태를 취한 경우다. LG화학과 LG생활건강, LG전자는 기존 회사를 지주회사와 사업자회사로 분할하는 과정에서 신설됐다. 하지만 LG화학과 LG생활건강은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LG전자는 금성사(1958년)가 모태다. 현대백화점, GS홀딩스, 아모레퍼시픽 등도 비슷한 사례다. 금융지주회사로 새롭게 출발한 우리금융지주와 신한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도 실제 역사는 198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가 분할된 대우조선해양 두산인프라코어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STX엔진 등도 마찬가지다.이렇게 보면 100대 기업 중 2000년 이후 설립된 기업은 2001년 한국로지텍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글로비스 한 곳만 남는다. 현재 한국 경제를 끌고 가는 100대 기업 가운데 94%가 1989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최소 20여 년 전 형성된 체제가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기업가 정신이라는 성장 엔진은 사실상 멈춰버린 것이다.이는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말한 ‘기업가적 사회의 도래’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사회와 경제구조의 극적인 변화를 분석한 피터 드러커는 미국이 ‘관리 경제(managerial economy)’에서 ‘기업가 경제(entrepreneurial economy)’로 이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앞으로 기업가 경제로 변모하지 못하는 나라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기업가 정신은 더 이상 기업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지식사회에서는 모든 조직과 개인이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고 혁신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가적 정력이 넘치는 혁신가와 기업가로 가득 찬 경제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기업가 정신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 생존의 문제인 셈이다.기업가 정신은 국가 경제의 성장과도 직결된다. 국내외 경제학자들의 연구는 기업가 정신이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특히 고용 창출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생 기업은 비효율적인 기존 기업을 대체해 가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끌어올린다.미국 뱁슨대와 영국 런던경영대학이 1999년부터 수행하는 기업가 정신 국제 공동 연구 컨소시엄인 GEM의 보고서는 한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 GEM이 세계 4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가 정신(창업 활동)과 경제 발전 단계 간에는 U자형의 관계가 나타난다. 즉, 초기에 활발하던 기업가 정신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이에 비례해 점차 약화된다. 그러나 특정 시점 이후에는 기업가 정신이 다시 활발해지는 경향이 발견되는 것이다. 변곡점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2만~3만 달러(구매력 평가 기준) 사이에서 형성된다.기업가 정신 육성을 통한 잠재성장률 제고 방안을 연구한 양현봉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초기에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창업 활동이 감소하는 것은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는 규모의 경제 효과 때문에 대기업의 역할이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선진국 단계에 진입하면 대기업의 고용 흡수력이 저하되고 그 대안으로 기회형 창업이 가파르게 증가한다.현재 한국은 U자형 곡선의 정중앙 변곡점에 위치해 있다. GEM의 연구에는 한국이 포함돼 있지 않지만 2007년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가 2만4600달러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GEM 모델상의 위치를 대략 추정해 볼 수 있다. 양 연구위원은 “한국이 추가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1인당 GDP 3만 달러에 도달하려면 기업가 정신의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말해준다”고 분석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가 정신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계승, 발전이다. 1960~70년대 산업의 틀을 세운 창업 1세대의 기업가 정신과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의 기업가 정신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양 연구위원은 “창업 1세대는 놀라운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지만 유치 산업 보호라는 틀 속에서 정부의 지원 하에 성장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며 “전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글로벌 환경에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업가 정신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외환위기 이후 벤처 붐이 불면서 새로운 기업가 정신의 모델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지만 거품이 생기면서 무산됐다”며 “이를 어떻게 다시 살려내느냐가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했다.취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