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조각가 권치규 김경민

따뜻하고 행복한 일상을 조각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쉬이 지나칠 수 있는 삶의 찰나를 포착해 영원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부부 조각가, 권치규 김경민 씨다.권치규(뒤) 1966년생. 홍익대 조소과 졸업. 성신여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홍익대 대학원 박사 수료. 홍익대 전주대 수원대 성신여대 강사 역임. 서원대 겸임교수(현).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 초대전 등. 1991, 1992 MBC 한국 구상조각대전 ‘특선’. 1996 대한민국 미술대전 ‘우수상’. 2002 대한민국 미술축전 ‘최우수상’. 2003 중국 상하이 아트 살롱(Art Salong) ‘청년 작가상’ 수상.김경민 1971년생. 성신여대 조소과 졸업. 성신여대 조소과 대학원 졸업. 한국미술협회 회원(현). 한국구상조각회 회원. MBC 방송국, 워커힐 호텔, 수원월드컵 조각공원, 제주도 샤인힐 리조트, 부천 복사골 조각공원 등에 작품 소장.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 초대전 등. 1996 MBC 한국구상조각대전 ‘대상’.이들 부부를 만난 곳은 일산 외곽에 있는 작업실 겸 살림집이다. 작년 12월 화제가 됐던 조각 전시회를 마친 후 이사까지 하느라 아직 부산한 모습이었지만 부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다. “결혼 10년 만에 처음 가진 부부 전시회였어요. 지금까지 수십 차례 전시회를 열었지만 매번 따로 열었는데 이번에 처음 함께한 전시회여서인지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 것 같아요.”(김경민)“처음에는 전시회를 각각 다른 장소에서 열 계획이었죠. 그런데 예전부터 우리 부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선화랑’ 측이 개인전을 선화랑에서 동시에 오픈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함께하게 됐죠.”(권치규)작년 11월부터 12월 9일까지 열었던 이들 부부의 조각전은 여느 합동 전시회와는 그 형식부터가 달랐다. 화랑 1층에서는 부부의 작품을 함께, 2층에서는 아내인 김경민 씨의 작품을, 3층에서는 남편인 권치규 씨의 작품을 전시했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날 것 같은, 시트콤을 연상케 하는 익살스러운 동작과 표정을 담아낸 김경민 씨의 작품들과 단순화한 형태에 강렬한 색감을 부여해 자연과 인간, 문명의 오묘한 관계를 조형화한 권치규 씨의 작품들은 평단은 물론 조각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일반 대중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특히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색채적인 면이라든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닮아 있어 부부 예술가다운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전시회였다.“작가의 생명력이랄 수 있는 ‘독창성’과 ‘차별성’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많이 신경을 쓰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자신만의 색깔을 서로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죠. 일례로 아내의 작품이 풍자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인체에 접근해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일상의 이야기들이라면, 저는 인체를 기호화한 비구상적인 작품으로 집약된 인간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죠.”(권치규) 그래서 이들 부부의 작업실은 단순한 작업실이 아니다. 서로가 마음을 나누고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동의 공간이자 이들 부부의 삶을 닮은 또 하나의 집이다.이들 부부가 만난 것은 1996년의 일이다. 김경민 씨가 재학 중이던 성신여대 대학원이 남녀공학으로 오픈하면서 남학생들을 받게 된 그 첫해에 권치규 씨가 입학했다.“학교 실기실에서 작업을 하다 친해지게 됐죠. 그때 전 MBC 한국구상조각대전에 낼 작품을 준비 중이었고 남편은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낼 작품을 준비 중이었죠. 늦게까지 실기실에서 작업하다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어요.”(김경민)그해에 김경민 씨는 MBC 한국구상조각대전에서 대상을, 권치규 씨는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전체 우수상에 해당하는 조각부문 대상을 받았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키워가면서 작품 활동에도 매진한 결과다.“사실은 딱히 데이트랄 것도 없었어요. 결혼하기 전까지 작업실에서 조각 작업만 했죠.”(김경민) “커피숍이나 영화관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서로가 일에 대한 열정이 크다는 걸 더 잘 이해해 주는 관계였던 것 같아요. 열심히 살고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 서로 그 모습에 더 끌린 거죠.”(권치규)두 사람은 1998년에 결혼했다. 대학원을 채 졸업하기 전이라 돈벌이도 시원치 않았고 두 사람 모두 불안정한 현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로의 작업을 100% 이해해 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이들 부부는 결코 불안하지 않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작품 활동에서도 서로의 존재는 가장 큰 응원군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짐을 나눠가며 아이 셋을 낳았고 각자 수십여 차례의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예술과 일상을 함께 나누는 삶은 넉넉하진 않지만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생각에 늘 행복하기만 하다. 흔히 부부 예술가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충돌이나 라이벌 의식도 없다.“잘 되면 같이 기뻐해 주고 슬프면 같이 슬퍼해 줄 수 있는 게 바로 가족이잖아요. 그러니 라이벌 의식이란 있을 수 없죠. 오히려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는 동료라고 할 수 있어요.”(김경민) “같은 작업실을 쓰는 동료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서로가 작업하는 모습 덕분에 작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되죠.”(권치규)그래서 이들 부부는 한시도 게으를 수 없다. 언제나 바로 곁에서 자신을 자극하는 존재가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는 육아를 비롯한 가정생활과 예술 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결혼할 때 생각한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어요. 간간이 작품이 팔리고, 또 작품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계속 만들어져 왔거든요.”(권치규) “문제는 육아였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웃음) 작업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란 정말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그 역시 둘이 함께이기 때문에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김경민)이들 부부는 결혼 초에 여느 부부들처럼 살림집을 마련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사는 대신 도시 외곽에 집과 창고를 지었다. 아이들이 크기 전까지 살림과 작업을 함께한 곳이다.“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로는 학원 차도 오지 못하는 곳이라서 그런지 여간 불편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작년에 이사해 한 1년간 아파트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김경민)하지만 아파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동안 부모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걱정해서다. 사실 많은 예술가들은 일상적인 공간과 작업실은 분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욕심보다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소중히 하기 위해 작업실과 살림집이 함께 있는 곳으로 다시 이사 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 욕구나 예술에 대한 강한 갈망 때문에 가정을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죠. 하지만 예술가의 자리가 부모의 자리를 넘어설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예술가로서의 욕구는 조금 자제할 수도 있다고 봐요.”(김경민)“우리에게 일상은 또 하나의 예술적 영감이기도 해요. 일상이 없다면 우리의 예술도 없겠죠. 그런 점 때문에라도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죠.”(권치규)그래서 조금 불편하지만, 조금 더 일상에 지배받게 될 터이지만 살림집과 작업실을 겸한 이곳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예술을, 자신들의 꿈을 계속 키워나갈 예정이다.“누군가가 결혼 생활은 살얼음 위에서 부부가 발을 꽁꽁 묶고 걸어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 사람이 힘을 주어서도 안 되고, 조금 느리고 답답하더라도 박자를 잘 맞춰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요. 우리 부부는 앞으로도 끝까지 서로를 위해가며 가정을 지켜가며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지켜봐 주세요.”(권치규 김경민)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