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도 웃는 기업의 비밀

세계 동시 불황으로 대부분의 기업들이 울상을 짓고 있는 요즘 일본의 한 회사는 ‘표정 관리’를 하기에 바쁘다. 게임기 업체인 닌텐도다.이 회사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9% 증가한 5300억 엔(약 7조9500억 원)에 달할 전망이다. 매출액 역시 8.8% 늘어난 8200억 엔(약 12조3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예상대로 이익을 내면 닌텐도는 도요타자동차 등을 제치고 일본 상장회사 중에선 이익 기준으로 1위를 차지하게 된다.닌텐도의 실적 호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정용 게임기 ‘위(Wii)’와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가 불티나게 팔린 덕분이다. ‘위’는 지난해 4~12월 사이 전 세계에서 2052만 대가 팔렸다. 전년 동기 대비 40% 증가한 실적이다. DS도 전년을 소폭 웃도는 2562만 대가 판매됐다. ‘100년 만의 경기 위기’에 게임기가 잘 팔린다는 데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위’와 DS의 성공 비결을 찬찬히 뜯어보면 불황기 소비 코드가 눈에 들어온다. 우선 불황으로 사람들이 외출이나 여행을 자제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 게임기의 수요가 증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다. 그렇다고 모든 게임기가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여가 활용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절약’ 개념 외에 소비자들은 ‘플러스알파’를 원한다.닌텐도가 성공한 포인트가 바로 그 ‘플러스알파’ 부분이다. DS의 경우 단순 게임뿐만 아니라 영어 학습, 지능 개발 등 교육적인 게임 타이틀을 개발해 게임기에 대한 부모들의 저항감을 최소화했다. ‘위’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운동 삼아 즐길 수 있는 게임기라는 게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DS는 ‘교육’, ‘위’는 ‘가족’과 ‘건강’이란 플러스알파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 불황기에도 대히트할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불황이라고 해서 시장에서 소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소비가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소비는 이뤄진다. 다만 소비 여력이 줄어든 만큼 소비자들의 눈은 더 까다로워진다고 봐야 한다. 단순히 싼 것만으론 소비자들을 잡을 수 없다. 저렴하면서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플러스알파’의 가치가 필요하다.= 혹독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닌텐도만큼이나 잘나가는 일본 회사가 또 있다. 중저가 의류 브랜드인 유니클로다. 유니클로는 작년 12월 매출액이 전년 같은 달에 비해 32% 급증하면서 ‘불황 상품의 황제’란 닉네임까지 얻었다. 유니클로의 월간 매출액 증가율이 30%를 넘은 것은 2001년 이후 7년 만이다.일본의 백화점과 전문점 등을 가리지 않고 의류 매출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이란 걸 감안할 때 놀라운 실적이다. 유니클로는 2008 회계연도(2007년 9월∼2008년 8월) 매출액과 영업이익도 각각 5876억 엔과 874억 엔으로 전년 대비 모두 두 자릿수로 늘었다.유니클로의 성공 요인으로 고유한 사업구조를 통해 제조원가를 낮춘 것이 흔히 제시된다. 일본 의류 유통업계에서 보기 드문 ‘제조 소매업’이라는 분야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이 유니클로인 건 사실이다. 일본 대부분의 의류 업체는 제조업체나 도매상으로부터 제품을 납품받아 판매하지만 유니클로는 제조 단계에서 부터 깊숙이 개입한다. 이 때문에 발 빠르게 기획성 히트 상품을 내놓을 수 있고 제조원가도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만으론 유니클로의 눈부신 성장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유니클로의 성공 요인도 단순히 ‘싼 가격’만은 아니다. 유니클로가 지난해 히트시킨 제품 중 하나가 겨울 내복인 ‘히트텍’이다. 일본에서만 2000만 장 이상 팔린 히트텍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히트텍은 몸에서 발산되는 수증기를 흡수해 열을 발생시키고 섬유 사이의 공기층이 열을 차단하는 기능성 신소재로 만들어졌다는 게 특징이다. 저렴한 가격에 실용적 기능성을 갖춘 것이다. 이처럼 유니클로는 소비자들의 숨겨진 니즈(Needs)를 찾아내 제품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유니클로는 실제 브래지어 기능이 합쳐진 민소매 여성 속옷, 겉옷인지 내복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게 디자인한 내복 등 히트 상품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다. 하나같이 ‘저렴하면서도 멋지고 실용적’이라는 특성이 공통점이다. 월간 매출액 신장률이 30%를 넘었던 2001년 당시에도 일본은 경기 침체와 디플레(물가 하락)가 겹친 불황으로 연말에 유니클로의 실용적이면서도 저렴한 방한복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었다.작년 도쿄 긴자와 젊은이들의 거리인 하라주쿠에 문을 연 다국적 중저가 의류 브랜드인 헤네츠&마우리츠(H&M)도 비슷한 경우다. 지난해 9월 긴자점의 개점일엔 약 5000명이 줄을 서 기다려 화제가 되기도 했던 H&M의 강점은 무엇보다 ‘저렴하면서도 멋지다’는 것이다. 명품을 사기에는 사실 돈이 없지만, 그래도 스타일이 좋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 H&M이다.H&M을 세계 3위 매출 규모의 패션 업체인 키운 롤프 에릭손 최고경영자(CEO)는 “경기 침체는 오히려 기회”라며 “경기 침체로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값비싼 명품보다는 저렴하면서 패셔너블한 ‘패스트패션(fast fashion: 패스트푸드처럼 유행을 빠르게 찍어낸다고 해서 붙은 명칭)’을 찾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런 현상을 ‘하류의 상(上)’ 현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하류의 상은 일본의 마케팅 전문가인 미우라 아쓰시의 책 ‘하류사회’에서 나온 말이다. 1990년대 장기 불황으로 중산층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하류가 된 상황에서 그래도 남들과는 차별화하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다. 불황에도 불구하고 싸지만 싸구려 티가 나지 않는 양질의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의 심리도 마찬가지란 얘기다.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도 불황기 소비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무인양품은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싼 가격으로 확보할 수 있는 양질의 친환경 소재 발굴, 제품의 핵심 기능과 관계없는 광택 염색 등 불필요한 공정의 생략, 로고 등의 장식을 최소화한 포장의 간략화 등이 특징이다.한마디로 ‘거품을 뺀 실용성’으로 불황기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인양품의 콘셉트는 심플한 디자인과 기능을 추구하는 소비 트렌드와 맞아떨어져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일본에서 요즘 직장인들에게 잘 팔리고 있는 전동자전거는 불황 때문에 타깃 고객이 바뀐 경우다. 전기 모터를 달아 언덕을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전동자전거는 원래 노인이나 어린 아이들을 태우고 다녀야 하는 주부들이 주고객층이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전동자전거의 주요 수요층이 직장인들로 바뀌었다. 기름 값이 크게 올라 승용차를 갖고 다니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자전거를 타기엔 체력이 부담인 직장인들이 전동자전거를 선택한 것이다.이런 히트 상품들을 보면 불황기 기업들의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 전략도 눈에 들어온다. 불황으로 주머니가 가벼워졌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싼 제품만 찾는 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소비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니즈를 불황이라고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동안 다양한 제품을 이미 경험해 본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에도 좋은 품질과 좋은 기능의 ‘보물’을 찾길 원하는지 모른다. 불황기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기업들이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인 듯싶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