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감소의 공포에 떠는 일본

일본 도쿄의 캐논 본사는 요즘 오후 5시 30분이 되면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야근을 위해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모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일본 기업에서 ‘칼퇴근’이 가능한 건 회사가 1주일에 이틀을 아예 ‘조기 퇴근일’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일찍 귀가해 더 많은 아이를 낳으라”는 것. “캐논은 회사 차원에서 강력한 출산 계획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기 퇴근 조치 역시 그 프로그램 중 하나”라는 게 요시나가 히로시 캐논 홍보부장의 설명이다.일본 기업들이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키면서까지 ‘아이를 더 낳으라’고 독려하는 현실은 저출산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일본의 출산율은 여성 1인당 1.34명. 한국(2007년 1.2명)보다는 많지만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출산율인 2명에 훨씬 못 미치긴 마찬가지다.이 때문에 일본 인구는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후생노동성이 연초에 내놓은 ‘2008년 인구동태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수에서 출생자 수를 뺀 자연 감소 인구는 지난해 5만1000명에 달했다. 2005년과 2007년에 이은 세 번째 자연 감소다.후생성은 “저출산과 고령화 추세로 앞으로도 인구 감소는 계속 확대될 것”이라며 “일본은 본격적인 인구 감소 사회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이는 초고령사회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는 게 후생성의 지적했다.인구가 줄어든다는 건 시장이 좁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업들엔 비상이 걸렸다. 특히 내수 업종인 금융회사들의 위기감은 심각하다. 일본의 손해보험업계 2위인 미스이스미토모해상과 4위인 아이오이, 6위인 닛세이도는 최근 합병을 발표했다. 세 회사가 합병하면 보험료 수입만 2조7000억 엔으로, 업계 수위인 도쿄해상홀딩스를 5000억 엔 정도 앞서게 된다.물론 이 세 회사가 합병을 결정한 건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구 감소와 경기 악화로 인해 국내시장이 축소됨에 따라 생존을 위해 합병한 것이다. 이들 손보 3사의 경영 통합은 손보 업계의 세력 재편을 떠나 생명보험과 은행을 포함한 금융계 전체의 재편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시장 축소라는 현실은 모두 똑같이 떠안고 있는 과제이기 때문이다.일본의 음료 회사나 제약 회사 등이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도 결국 시장 축소 때문이다. 인구 감소로 일본 시장에선 더 이상 매출을 늘릴 수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중국이나 호주 등 거대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현지 업체를 인수하고 있는 셈이다.노동 인력 부족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일본 경제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이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내수 위축을 막기 위해 이주 정착을 전제로 한 이민을 받아들이자고 공식 제안할 정도다. 게이단렌은 그간 자체 이민 정책으로 내걸었던 ‘기간을 한정한 외국인 노동자 수용’이라는 방침을 바꿔 이주 이민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에 따르면 2055년 일본의 전체 인구는 지금보다 약 30% 줄어든 9000여만 명. 그중 15세 이상 65세 미만 생산연령인구는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4600여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일하는 인력 1.3명이 고령자 1명을 부양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 재계는 이런 현실에서는 젊은 세대의 부담 증가로 사회보장제도가 파탄에 빠지고 의료나 간병 교육 치안 등 경제사회 시스템이 취약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실제 인구 감소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당장 나이가 들어 받게 될 연금 액수도 줄어들 전망이다. 일본이 현재의 공적연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받는 후생연금의 지급 비율을 단계적으로 줄여 2038년 이후는 현재보다 20% 정도 낮춰야 한다는 분석이 최근 제기됐다. 저출산에 따라 연금보험료 징수액이 갈수록 줄어드는 데다 경기 악화에 따른 적립금 감소로 향후 연금 지급 비율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후생노동성은 향후 연금 정책 전망에서 현재 연금 지급 비율은 현역 세대가 벌어들이는 평균 수입의 62.3%이지만 2038년에는 50.1%로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전망은 일본의 향후 출생률을 1.26(2007년은 1.34)으로 연금의 장기 운용 이자 수익을 4.1%, 현재의 불황이 끝난 2015년 이후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0.8%로 잡고 계산한 것이다. 현재 3분의 1인 기초연금의 국가 부담분을 2분의 1로 올리는 것도 전제로 했다.인구구조의 고령화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핵가족화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가정에서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세대가 갈수록 늘고 있다. 그 같은 ‘노노(老老)간호’에 지쳐 동반 자살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증가 추세다.일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2005년 후쿠이현 오노시 폐화장터의 80대 부부 동반 자살이 대표적 케이스다. 당뇨병으로 걷지 못하는 82세 부인을 간호해 오던 남편은 부인이 수년 전부터 치매 증상까지 보이자 이를 비관해 동반 자살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경찰청 집계 결과 지난해 1~11월 ‘간호에 지쳤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미수 포함)을 저지른 노인은 21명으로 전년 동기 5명에서 4배 이상 늘었다. 간병보험을 받는 세대 중 간호자와 피간호자가 함께 65세 이상인 노노 간호 세대는 2001년 40.6%에서 2007년에는 47.6%로 증가했다.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산교의대가 2002년부터 5년에 걸쳐 현 내 60세 이상 남녀 3000명을 추적해 이 기간 병이나 노쇠로 숨진 381명을 분석한 결과 노노 간호 남성이 건강한 가족과 동거하는 남성에 비해 사망률이 2배나 높았다. 게다가 간호하는 남성이 지팡이를 짚는 등 신체가 부자유한 경우는 사망률이 4배나 됐다.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파격적인 대책을 동원해 출산 장려에 나서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해부터 출산비를 정부가 전액 지급하는 것. 젊은 부부들이 출산비를 걱정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일본에서는 현재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병원비를 스스로 부담하고 나중에 정부로부터 ‘출산·육아 지원비’로 35만 엔(약 520만 원)을 받는다. 하지만 앞으로는 환자 본인이 병원비를 낼 필요 없이 정부가 직접 병원에 출산비를 지급한다.일본 정부는 또 최근 확정한 경기 부양책에서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임신부 검진’ 비용을 전액 무료화하기로 했다. 임신부 검진은 현재 5회분까지만 무료이지만 앞으로는 출산 때까지 필요한 14회분을 모두 무료화하기로 한 것이다.저출산 대책엔 재계도 동참하고 있다. 게이단렌은 최근 ‘가족 주간’을 만들어 회사원들이 집에서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이 자녀를 갖도록 권고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캠페인은 저출산의 원인이 기업에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일본의 가족계획 기관이 49세 이하 부부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과중한 업무로 잠자리를 가질 힘이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한 달간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부부는 2004년 31.6%에서 2006년 34.6%, 2008년 36.5%로 꾸준히 증가했다. 이들은 ‘회사 일이 너무 피곤해서’ 또는 ‘성관계에 흥미를 잃어서’를 이유로 꼽았다.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업무량이 많은 나라다. 가족계획 기관의 구니오 기타무라 회장은 “같은 방 안에서 TV를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저출산 해소에)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