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들판, 푸른 하늘, 역시 푸르른 나무들. 그리고 저 멀리 산들이 지나간다. 산은 언제나 그렇듯 말없이 모든 자연을 보듬고 있다.나는 지금 KTX를 타고 부산을 향하고 있다. 하루하루 쉴 새 없이 변하는 자본시장을 지켜보며 치열하게 살아가더라도 가끔은 조금의 여유를 가질 때가 있다.

그렇게 달력을 보니 5월의 월간 계획표에는 어버이날에 붉은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아, 어버이 날이구나!“근해는 참 엄마를 많이 닮았네요.”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학교에 오시는 날이면 한 번도 뵙지 않았던 선생님들도 ‘저분이 근해 어머니시구나’라면서 모두 알아볼 만큼 나와 어머니는 붕어빵이었다.

얼굴만 붕어빵이 아니라 식성과 성격, 피곤해지면 엉덩이에 종기 나는 위치까지 닮았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아버지와 나는 공통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아버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와는 반대다. 모임에 가면 언제나 총무나 회장을 도맡아 대장일을 해야 속이 시원한 나와 달리 아버지는 선비 스타일에 원리원칙을 따지는 내성적 성격이었다. 어떤 모임에서도 조용하셨고, 친구들 뒤에서 묵묵히 웃기만 하시는 아웃사이더였다.

어떨 때는 조롱의 대상이 될 만큼 무시당할 정도로 아버지는 조용하기만 했다.어린 내 마음에는 이런 아버지가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었나 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머리가 조금 굵어졌다고 아버지가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남자로서 남자의 세계에서 뒤처진 아버지는 어린 내가 볼 때 큰 집, 멋진 차, 떵떵거리는 높은 지위의 친구 아버지들에 비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만큼 작아 보였다.

아버지의 충고가 나에게 먹힐 리 없었다. 아버지의 충고보다는 내 스스로의 판단이 더 나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은 지나갔다.철이 들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영웅이 되어갔다. 다른 아버지들이 ‘부산 싸나이’를 내세우며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과 달리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한 발짝 물러나며 자율과 선택을 부여한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식의 앞길을 인도해 주신 것이다.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노는 것이 마냥 좋기만 했던 중고생 시절, 속을 썩이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 도서관행을 자처하셨다.공무원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며 휴가 때는 좀 쉬셔도 좋았으련만, 여름휴가를 도서관에서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강압이 아닌 자율 교육을 위해 아버지는 밤 12시까지 아들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공부했다.그때 알았다. 도서관의 다른 수험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큰 산과 같다는 것을.

바람을 막아 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때론 약수로 목을 축여 주는 산은 그 안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의 그 어깨는 나에게는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이다.자식이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주식 투자를 한다며 퇴직금을 모두 날렸을 때에도 그 어깨는 여전히 따뜻하게 열려 있었다.

내가 해병대 장교로 힘든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따뜻한 편지와 선물로 힘든 나날을 달래 주었던 후원자이기도 했다.겉으로는 내세울게 없는 초라한 시골영감이지만 어느덧 건장하게 성장한 아들에게는 너무나도 고마운 큰 산이다. 조용하지만 메아리가 나지막하게 울리는 아름다운 큰 산.지금도 아버지는 매일매일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신다.

아들은 성장했지만 아직까지 그 큰 산을 넘을 수 없는 건 그 산이 꾸준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 아닐까.언제나 자식과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가 바빴던 아버지. 힘들게 생계를 꾸리면서도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뒤를 돌봐주었던 움직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랑, 조용한 애정이 아버지의 참모습이다.큰 산을 뒤로하고 유유히 달리는 KTX야, 빨리 달려라! 어서 내려가 아버님을 한번 크게 안아 드려야겠다.




정근해·대우증권 리서치센터 코스닥팀장

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한 뒤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에 입사해 현재 코스닥팀장을 맡고 있다. KDI 국제정책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2008년 하반기 한경비즈니스 베스트 애널리스트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