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교수의 세계경제 전망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5월 19일 ‘세계 경제금융 컨퍼런스’에서 “이번 위기는 단순한 ‘미국발 금융 위기’가 아니다”며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과다한 차입이 있었고 이에 따른 디레버리지(차입 축소) 과정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면서도 “각국의 환경 정책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번 세계경제의 위기는 단순히 한 나라에서 파생된 문제가 아니라 실물경제가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부채를 키워 온 세계경제의 시스템적인 문제이며 이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 혹은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경제의 재도약을 이끌 가장 유력한 후보는 ‘그린 테크놀로지’라는 주장이다.크루그먼 교수는 현재 세계경제 위기의 시작은 ‘대공황’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 산업 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지고 세계무역의 하락 속도는 오히려 대공황보다 더 빨랐다고 분석했다. 그는 먼저 이번 위기는 미국에서 시작됐다는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에 대한 느슨한 규제와 주택 가격의 버블을 위기의 시작으로 주목했다. 그는 “증권화 과정도 문제였다”고 지적하며 “채권담보부증권(CBO)처럼 자산의 증권화는 애초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나중에는 리스크 자체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결국 주택 버블이 꺼지면서 주택 담보대출에 기반한 금융 시스템이 흔들렸고 이로 인해 소비자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전체 금융 시스템이 마비됐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소개했다.그는 “사실 이 같은 견해보다 좀 더 글로벌하게 이번 위기를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제의 진짜 원인으로 세계경제에 만연한 ‘과도한 부채’를 지목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의 1945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비율은 20%에 불과했다”며 “1980년대 레이건 정권부터 급격히 상승해 2001년에는 100%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과도한 부채는 주택 버블을 일으켰다”면서 “이는 단지 미국만의 상황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이 같은 결과의 예로 “미국은 연안 지역에만 주택 버블이 있었지만 아일랜드나 스페인은 전체 주택 시장에서 버블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과도한 부채에 의해 창출된 유동성이 전 세계적인 자산 버블을 일으켰다는 것이다.크루그먼 교수는 이처럼 부채비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원인을 세 가지 정도로 지목했다. 첫 번째 이유는 ‘금융 규제의 실패’다. 그는 “전통적인 상업은행 외에 투자은행, 헤지 펀드 등 이른바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 system)’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결국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 전통적 금융 시스템의 규모보다 더 커졌다”면서 “이 같은 그림자 금융이 실질적으로 은행 역할을 했지만 규제 시스템이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두 번째 이유 역시 ‘과도한 규제 완화’에서 원인을 찾았다. 미국 상업은행의 경우 대공황 이후 50년 동안 정부 당국의 정교한 규제에 의해 지루할 정도의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규제가 지나치게 완화되면서 은행 간의 경쟁이 심해졌고 그 결과 상업은행들이 리스크를 감내하면서도 대출을 늘렸다는 것이다. 그는 “2003년에 미국 은행 규제 당국이 규제 완화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톱을 들고 사진을 찍었던 일이 기억난다”며 “이 같은 태도가 위기를 키웠다”고 비판했다.세 번째 이유는 오랜 기간의 안정으로 인해 각 경제 주체가 리스크에 대해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2005년 당시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이 말한 ‘안정적인 성장기(great moderation)’의 예를 들면서 “20년간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며 “이제는 ‘경제 위기’라는 건 사라졌고 대공황은 할아버지 세대의 문제일 뿐이라고 간주하면서 모든 경제 주체들이 과도한 리스크를 감수하려 했던 게 더 큰 문제를 낳게 됐다”고 설명했다.크루그먼 교수는 “이 같은 요인으로 인해 세계경제의 위기가 발생한 것”이라며 “이 때문에 최근의 위기를 단지 ‘신용 위기’ ‘금융 위기’라고 범위를 좁혀 말하는 것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크루그먼 교수는 결국 최근의 경제 위기를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왔을 위기’라고 주장했다. 즉, 가계가 그동안의 과도한 부채와 소비를 줄여야만 했다는 얘기다. 그는 또 주택 시장에도 주목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스페인 주택 시장의 예를 들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싼 주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결국 과도한 부채를 통해 일어난 자산의 버블은 언젠가 꺼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크루그먼 교수는 이에 따라 “‘중기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그는 “다행스럽게도 위기의 가장 힘든 시기는 지났다”고 평가했다. 각국의 정책 당국이 유례없이 제로 금리, 혹은 그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빠르게 금리를 낮추며 위기에 선제 대응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보냈다. 그 결과 채권 가산금리나 리보(LIBOR)금리가 하락하는 등 세계경제의 각종 지표들이 하향 속도를 낮추며 ‘안정화’의 과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다만, ‘안정화’를 지나 ‘회복’의 단계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답이었다. 그는 이번 금융 위기의 본질이 단지 신용이나 금융의 문제에서 나온 ‘일회성 공포’가 아닌 ‘세계 각국의 과다 부채’로 인한 근본 시스템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마도 전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긴 디레버리징(부채 해소) 기간이 이어지며 침체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크루그먼 교수는 구체적으로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는 “이번 위기로 저축률이 높아지며 민간의 소비 심리가 위축될게 분명하다”고 전망했다. 특히 그는 “금리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투자 역시 활발해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들은 자본비용에 그렇게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그는 “경기 침체가 기술적으로는 올 하반기에 종료된다고 하더라도 고용 시장 악화는 2013~14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크루그먼 교수는 “그 결과 회복을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출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그는 “오바마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GDP 대비 2.5% 수준에 불과하다”며 “이 조치는 회복보다 ‘슬럼프 탈출’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미국 정부가 이보다 더 공격적인 재정 정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국채로 인해 재정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례로 아일랜드의 경우 과도한 부채로 발목이 잡혀 지출을 줄이고 과세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황 타개를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며 “이 같은 문제가 다른 국가로 확대된다면 세계경제의 실질적 회복은 더욱 늦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는 또 일본의 예를 들며 전 세계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일본은 다른 나라에 수출해 이를 극복해 냈지만 지구적인 차원으로 보면 다른 행성에 수출할 수도 없는 문제인 만큼 오히려 더 심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크루그먼 교수는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답이 있다면 ‘근본적인 신기술’이 답”이라며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그린 테크놀로지’”라고 전망했다.그는 그린 테크놀로지를 전 세계 국가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례로 기존의 빌딩을 그린 빌딩으로 바꾸면 이를 통해 여러 연관 산업들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부의 창출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또 “미국도 탄소 배출 거래에 들어가야 한다”며 “여기에 참여하는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줘서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크루그먼 교수는 또 투자은행 등 ‘그림자 금융’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상업은행과 똑같은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위기의 한 측면이 이들 그림자 금융의 과도한 경쟁에서 촉발된 바 있으며 위기 발생 시 정부가 구제해 줘야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평상시에도 똑같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마지막으로 크루그먼 교수는 “이번 위기를 통해 반드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이런 교훈 없이 지나치게 빨리 회복된다면 10년 후에는 오히려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0년 전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이번 글로벌 금융 위기의 전주곡이었다”며 “불과 얼마 전 동유럽에 자본이 대거 유입되던 모습이 10년 전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다”고 말했다.그는 “1998년에 미국 롱텀캐피털(LTCM)이 파산하는 등 10년 후의 상황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증거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례적인 상황이고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위기 이후의 세대는 리스크를 좀 더 세심하게 살피고 합리적으로 투자하는 세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아직은 세계경제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정도”라며 “이번 위기가 끝난 뒤에 위기를 빨리 망각한다면 2018년엔 더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5월 19일 열린 컨퍼런스에서 ‘신용 위기와 세계경제’, ‘오바마노믹스’ 등 두 차례의 세션에서 각각 기조연설자와 패널로 참여해 세계경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내비쳤다. 타 참석자들과 가졌던 Q&A 시간에서 밝힌 주요한 그의 답변을 모았다.현재 미국과 유럽은 전례 없는 후퇴 과정에 있다. 미국의 아웃풋 갭(장기 추세 성장률과 현재 성장률의 차이)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7% 수준으로 매우 높다. 디플레 압력이 있는 게 사실이다.정의상으로는 일부 경제지표가 회복되면서 불황이 끝났다고 본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V자형 회복이 나타난 유례는 없다. 산업생산이 회복돼도 실업률이 높아지곤 했다. 그 결과 경기 침체가 올해 9월 끝난다고 하더라도 노동시장은 2013~14년에나 회복될 것이다.인플레이션은 아직 걱정할 단계가 아니다. 통화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은행들이 정부로 부터 받는 돈을 중앙은행(FRB)에 다시 입금하고 있다. 따라서 FRB는 민간 은행들이 대출하기 꺼리는 돈을 다시 빌려오는 것이다. 또 크레디트 라인(신용 공여)을 줄이면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선택의 여지가 없다. 금리가 사실상 제로 수준인 상태에서 통화정책이 먹힐 리 없다. 이 때문에 재정 정책밖에는 답이 없다.앨런 그린스펀 전 FRB 회장은 2005년 현대적 금융 시스템과 기법으로 리스크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금융 시스템을 육성해야 하지만 이 같은 말을 지나치게 믿으면 안 된다.경상수지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지 수출 중심이냐 내수 중심이냐는 핵심이 아니다. 특히 최근의 원화가치 평가절하는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한국의 원화 약세는 수출 증대로 이어져 비싼 엔화로 고생하는 일본에 비해 볼 때 현상황에서 경제 회복의 큰 디딤돌이 되고 있다.약력:1953년생. 74년 미 예일대 경제학과 졸업. 77년 MIT 경제학 박사. 78년 예일대 교수. 97년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현). 91년 미국경제연합 존 베이트 클라크상 수상. 82년 백악관 경제자문 위원.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