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사막 ⑨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세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됐지만 고시에 수석 합격해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거치면서 인간 승리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만 잘살겠다는 사회엔 꿈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가진 이들이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권력이든 돈이든 사회적 지위든 가진 사람이 갖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것이 부족합니다. 저만 잘살려고 할 뿐입니다.”그는 “나 자신과 생활을 같이하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아름다운 꿈, 착한 꿈, 고운 꿈을 갖고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언젠가 한 로스쿨 지망생이 국제 관계 변호사가 돼서 호화 빌라와 스포츠카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변호사가 돈에 눈독을 들이면 법의 창녀로 전락하게 된다.”미국의 추리 작가 존 그리샴의 소설들을 읽으면 변호사를 창녀에 비유한 김 전 소장의 비유에 공감할 것이다. 변호사는 업무의 속성상 선과 악을 넘나드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선의의 피해자 측을 변호하면 선의 입장에 서지만 온갖 부정의를 일삼는 측을 변호하면 악의 입장을 변호하게 된다.물론 변호사 자신의 의지로 ‘악’의 변론을 맡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김 전 소장이 말한 것처럼 ‘맑은 영혼’을 지녀야 하고 자신의 생활윤리와 원칙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그리샴의 소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원제 ‘The Firm’, 시공사 펴냄)’에서 주인공은 선택의 순간에서 제1의 기준을 ‘돈’에 두었다. 돈의 유혹에 끌려 변호사로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는 주인공은 그만 함정에 빠지고 만다.= “좋소. 첫해에는 기본급 8만 달러에 보너스를 지급하겠소. 둘째 해에는 8만5000달러에 보너스, 컨트리클럽 회원권 둘에 새 BMW도 한 대 내드리게 될 거요.”누구든 이러한 제안에 유혹당하기 십상이다. 영화 ‘야망의 함정’으로 재현된 이 소설은 하버드대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가 마피아 세력이 된 로펌에 들어가면서 소설이 전개된다. 주인공 미치 맥디르에게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대형 로펌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뿌리치고 남부 소도시인 멤피스의 작은 법률 회사를 선택한다. 그 기준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할 때 6만 달러의 등록금 대출금을 안고 있는 맥디르는 그만 물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를 덥석 물고 만다. 돈에 굶주린 젊은 변호사는 대형 로펌의 타깃이 되기에 안성맞춤인 존재들이다. 맥디르는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로펌에 들어가지만 마피아의 소굴이 된 로펌의 생활은 감옥과 다름없다. 그가 들어간 로펌은 범죄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고 세금을 탈루하게 해주는 악의 조직이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뿐만 아니라 집과 승용차 등 그가 있는 곳마다 강력한 도청 장치가 설치돼 감시당하고 또 미행당한다. 또 출근 첫날부터 엄청난 업무에 내몰린다.= 신출내기들은 정말로 놀라웠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에다 스무 시간씩 1주일에 엿새를 일했다. 그렇지만 인간의 신체는 그렇게 함부로 굴릴 수가 없었다. 1주일에 백 시간씩 일하면서 6개월 이상 버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 약자는 잡아 먹히고 강자는 부자가 되는 등이 휘어지는 작업이라고. 마라톤 같아. 참는 사람이 금메달을 차지하게 돼.”성공에 함몰돼 있는 맥디르는 신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야근하다시피 한다. 돈에 눈먼 신참 변호사답게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일중독자를 자청한다. 독수공방하던 신부 애비는 남편의 이 말에 참다못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결승점에서 죽겠지요.”이 소설은 고액 연봉을 받는 변호사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알게 한다. 로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른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파트너는 로펌이 능력을 검증받은 변호사에게 최고 대우를 보장하며 계약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용을 낼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일합니다.”이 말처럼 냉혹한 표현이 있을까. 조직에 얽매인 직장인들이라면 세상살이의 무게가 담긴 이 말이 얼마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소설에서 연봉 50만 달러(이 소설이 출간된 1991년 기준)를 받는데 통상 로펌 입사 후 1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여기서도 앤더스 에릭슨의 이른바 ‘10년 법칙’이 적용됨을 알 수 있다. 10년 법칙이란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과와 성취에 도달하려면 최소 10년 정도는 집중적인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변호사의 업무상 의뢰를 받은 소송마다 승소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깊은 고뇌에 휩싸일 수 있다. 소송사건이 모두 부당한 피해나 억울함을 당한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악의 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승소한다면 변호사로는 성공할 수 있어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길’과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똑똑한 엘리트들이 많다고 사회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중심에 엘리트층이 있다.”= “와튼 스쿨에서 MBA 과정을 공부할 때 한 법대 교수는 좋은 성적으로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학생들이 있었는데 10년 뒤에 보니 감옥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이는 존 그리샴의 추리소설을 애독하는 안철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좌교수가 한 말이다. 이 소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안 교수는 “인성이 결여된 똑똑한 인재보다 도덕성을 갖춘 노력하는 인재가 사회를 밝힌다”고 강조한다. 이 소설에서도 하버드대를 나온 엘리트 변호사는 자신만의 이기적인 성공에 집착하다 그만 ‘일패도지’ 상태에 빠지고 만다.어느 날 주인공은 자신에게 은밀하게 접근해 온 FBI(미연방수사국) 요원에게서 보트 폭발 사고로 숨진 것으로 알려진 두 명의 변호사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의해 청부 살해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일순간 맥디르의 일상과 직장 생활은 감옥보다 더한 곳으로 변하고 만다.그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직장을 선택할 때 ‘돈’을 제1의 기준으로 둔 데서 시작됐다. 전도유망한 엘리트 법학도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결국 주인공 부부는 FBI에 협조해 로펌의 추악성을 폭로한 대가로 FBI에게 받은 보상금을 지닌 채 로펌의 보복(청부 살인)을 피해 바다를 전전하는 ‘바다 유랑족’ 신세가 된다. 바다에서만큼은 육지보다 보복에서 좀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돈에 영혼을 팔았던 한때의 잘못된 선택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엘리트 인재라고 할지라도 돈에 눈이 멀어 순간적으로 잘못 선택하면 얼마나 처절한 대가를 받는지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사실은, 난 조금도 변호사가 되고 싶지 않았어.”주인공 맥디르는 바다를 떠도는 낭인의 신세가 된 후에야 이런 고백을 아내에게 한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는 늦었다. 때로는 원칙 있는 삶을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삶과 꿈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 이른바 대니얼 레빈슨의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서 지적한 것처럼 꿈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고액의 연봉과 권력을 손에 넣더라도 질식 상태에 이르고 ‘감옥’으로 변할 수 있다.소설은 때로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더 교훈적인 지침들을 제공하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샴의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변호사라도 모두 같은 변호사는 아닌 것이다.= “진짜 고객들, 진짜 사람들, 진짜 사건들, 진짜 삶.”이는 그리샴의 또 다른 소설 ‘어소시에이트’에 나온다. 원칙 있는 삶,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의 유혹에 약해져서는 안 된다. 거액의 돈이야말로 원칙 있는 삶, 진짜 삶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소시에이트’의 주인공들은 진짜 삶을 찾아 로펌을 탈출해 ‘평범한’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다.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 문학박사 roma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