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아시아’는 가능한가

최근 열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경제발전 방식의 전환’이었다. 과거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수출 주도형 성장 모델을 버리고 내수 중심의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경제발전 모델 전환을 잠시도 늦춰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중국에 수출용 부품과 중간재를 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아 온 주변 아시아 나라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서 최근 몇 년간의 역내 교역 품목을 분석하던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박동준 과장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한국의 대중 수출 품목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대중국 상위 수출 품목은 전기전자·자동차부품·기계류 등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내수 위주 정책에 따라 상당한 품목 교체가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박 과장은 “가전하향(家電下鄕) 등 중국의 내수 진작 주 타깃 품목이 ‘공교롭게도’ 기존 주력 수출 품목과 겹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가전과 자동차 중심의 내수 부양에 나섰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종전처럼 중국의 수출이 늘어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냈다는 설명이다. 다만 수출용으로 팔았던 것을 내수용으로 판매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역내에서 완결되는 무역구조 형성

하지만 이것만으로 중국의 성장 모델 전환이 몰고올 여파를 속단하기는 이르다. 비록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아시아 무역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하다. 박 과장은 “아시아 경제 전문가들의 최근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중국의 내수 중심 전환이 이 지역의 ‘디커플링’을 가능하게 할 것이냐”라고 말했다.

그동안 아시아 나라들의 주된 수출 시장은 미국과 중국 두 곳이었지만 이들은 사실상 하나였다. 중국은 미국으로 향하는 중간 조립 공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경제에 위기가 닥치자 중국 시장까지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데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중국이 자체적인 내수시장을 갖춘 새로운 최종 소비자로 변신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시아 국가들 입장에서는 서로 영향 받지 않는 두 개의 거대 시장을 갖게 되는 셈이다. 박 과장은 “거대 소비자로서 중국의 등장은 역내 교역 확대와 안정 성장이라는 희망을 던져준다”고 말했다.

중국의 내수 육성 정책이 아시아 주변국에 과연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박번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중국이 성장 추세를 유지한다면 주변국 입장에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수출로 나갈 물량을 내수로 소화해 전체 생산량이 똑같이 늘어나면 중국이 수출에 치중하든, 내수에 치중하든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박 위원은 “오히려 한국의 대중 부품 수출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동안 중국은 가공무역으로 성장해 왔다. 지금도 전체 교역 중 거의 절반은 가공무역이 차지한다. 휴대전화에서 노트북, DVD플레이어, PDP TV에 이르기까지 부품을 거의 대부분 수입한 다음 이를 단순 조립해 선진국 시장에 수출해 왔다.

하지만 중국은 2005년 이후 자국 부품 사용 비율을 꾸준히 끌어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하는 ‘조립 생산형 국가’에서 부품과 중간재를 자체 생산하는 ‘일괄 생산형 국가’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기로에 선 중국…아시아의 ‘홀로서기’ 도전
이는 아시아 주변국에는 큰 위협 요인이다. 박 위원은 “중국의 부품 수입 대체 현상으로 2~3년 전부터 한국의 대중 부품 수출 비중이 감소하고 있다”며 “과거처럼 수직적 분업 구조에 안주하기보다 완제품 쪽에서 틈새시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중국이 내수형 성장을 선택한 이상 아시아 무역구조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이 삶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경제의 틀을 바꾸면 그에 따라 새로운 시장이 생겨난다”며 “앞으로 그런 시장에 걸맞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선진국 수요가 많은 중고가 소비재 생산은 줄고 중저가 제품 판매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내수시장이 성숙하면 저가 공산품을 생산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서비스업으로 전환되는 현상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베트남·미얀마 등 동남아 주변국들이 중국의 저가 공산품 생산을 넘겨받게 될 공산이 크다.

김 연구위원은 “생산 기지 전략에도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선진국 시장이 최종 수출 목적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앞으로는 생산지 전략을 수립할 때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최종 목적지로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고가품은 중국에서, 저가품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생산하는 식의 생산 기지 분업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Chinese-made cars set for export wait to be shipped at a port in Shanghai, eastern China, Friday, Dec. 8, 2006. China will celebrate the fifth anniversary of joining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on Dec 11th. (AP Photo) ** CHINA OUT **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Chinese-made cars set for export wait to be shipped at a port in Shanghai, eastern China, Friday, Dec. 8, 2006. China will celebrate the fifth anniversary of joining the World Trade Organization on Dec 11th. (AP Photo) ** CHINA OUT ** <저작권자 ⓒ 2006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는 중국이 저임금에 의존한 성장 전략을 지속하기 어려운 ‘고비용 국가’가 될 것이라는 예측에 근거한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중국의 인구구조로 봐도 지금과 같은 수출 중심 성장 전략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중국에 2010년은 인구통계학적으로 전환점에 해당한다. 1970년 이후 출생률의 지속적인 하락과 고령층 인구의 완만한 증가에서 온 ‘인구 보너스’가 정점을 기록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노동자들이 부양해야 하는 인구의 비율을 뜻하는 ‘부양비율’이 올해 바닥을 찍고 내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인구 고령화로 중국에서도 이제 값싼 노동력이 귀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인구구조로도 수출 중심 성장 한계

물론 내수형 성장은 중국만의 과제는 아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도 오랫동안 내수 육성을 통한 균형 성장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내수형 성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김 연구위원은 “생산 분업을 통해 아시아 전체의 역내 수요를 확대하는 것이 외생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내수형 성장, 즉 ‘넥스트 아시아’의 궁극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다시 수출 주도형 정책으로 복귀할 가능성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중국 내수시장 공략에 열을 올린 한국 기업들의 성과는 기대에 훨씬 못미칠 가능성이 높다.

수출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내수 육성론이 힘을 받다가도 상황이 호전되면 쏙 들어가는 것은 국내에서 수없이 보아 온 현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다시 위기 이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분석한다. 김 연구위원은 “소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은 중국이라는 대안을 찾을 수 있지만 경제 규모가 훨씬 큰 중국은 외부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