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신화 ‘흔들’ 골드만삭스의 미래
또 골드만삭스다. 연초 고액 보너스 지급 문제로 여론의 뭇매를 받았던 골드만삭스가 이번엔 사기 혐의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제소당했다. 상품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빠뜨리고 판매해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는 혐의다.SEC의 제소 후 골드만삭스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면서 반(反)월가 정서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언론들은 향후 골드만삭스의 위상 변화와 금융계에 끼칠 영향, 정치적 파장 등을 분석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당장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속단하기는 힘들다. SEC가 18개월 준비 끝에 제소했지만 골드만삭스는 “잘못한 게 전혀 없다”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SEC와 골드만삭스 간 지루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부동산 폭락하자 하루 1000만 달러 수익
골드만삭스 기소에서 관심을 끄는 대목은 사태의 진행 과정이다. 이를 짚어보면 지난 금융 위기 과정에서 헤지 펀드와 투자은행들이 어떤 짓을 했으며 미국 감독 당국은 이번 사건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대충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언론의 보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번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세 사람이다. 헤지 펀드 업계의 전설로 불리는 폴슨앤드컴퍼니의 존 폴슨 회장이 등장하고, 그 뒤로 월가의 풍운아인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CEO) 로이드 블랭크페인과 야심만만한 SEC의 여성 위원장 메리 사피로가 주연급으로 나온다.
월가의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날리던 골드만삭스의 패브리스 투레 부사장과 5월 금융개혁법안 통과에 사활을 걸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등은 조연으로 출연한다.
이야기는 폴슨 회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 그레고리 주커먼은 자신의 책 ‘사상 최고의 거래’에서 폴슨은 금융 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월가에서 ‘그렇고 그런’ 헤지 펀드 오너 중 하나였다고 적고 있다. 폴슨은 어그레시브(agressive)한 월가 투자맨들과 달리 힘없이 악수하고 항상 말쑥한 정장 스타일만 고집하는 은행형 인사라는 것.
1994년 베어스턴스에서 독립하면서 직원 1명과 200만 달러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한 그는 2006년 초반까지 다른 헤지 펀드들이 부동산 거품에 베팅해 돈을 쓸어 모을 때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다. 그는 조바심이 났다.
폴슨은 “시장이 미쳤다”며 이런 상황을 투자로 연결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회사 애널리스트인 파올로 펠레그리니를 압박했다. 얼마 후 펠레그리니는 미 주택 시장을 1975년부터 분석해 완벽한(?) 투자 모델을 만들어 냈다. 결론은 곧 40% 이상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격 하락에 베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폴슨은 투자자들이 부동산 관련 파생상품 가치 상승에 돈을 걸 때 하락 쪽에 베팅하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일종의 보험 상품, 즉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redit Default Swaps)를 사두는 것이다. 이 상품은 부동산 파생상품 가격이 떨어지면 그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투자 수익이 난다.
폴슨은 비관적 부동산 시장 전망과 이 같은 투자 전략의 성공 가능성에 확신을 갖고 2006년 상반기 내내 월가의 투자은행을 돌며 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대부분이 이 같은 전망에 고개를 저었지만 그해 여름 골드만삭스에서 연락이 왔다. 폴슨은 골드만삭스에 이런 모델로 상품을 만들어 투자자를 모집할 수 있느냐고 문의했고, 일은 그의 방식대로 추진됐다. 골드만삭스가 언더라이팅을 맡았고 ACA캐피털 인베스트먼트가 상품 설계를 담당했다. 그리고 도이체방크 등 수많은 투자자가 돈을 넣었고 폴슨은 역베팅했다.
폴슨은 이런 식으로 2007년까지 총 50억 달러를 부동산 하락 쪽에 베팅했고 시장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의 회사는 그해 총 150억 달러의 이익을 냈다. 그의 몫은 40억 달러였다. 매일 1000만 달러(120억 원)씩 벌어들인 셈이다. 월가를 통틀어 사상 가장 많은 투자 수익을 낸 그는 곧바로 전설로 불리게 된다. 그는 펠레그리니 계좌에 4500만 달러를 보너스로 넣었다.
이때 골드만삭스를 이끈 사람이 바로 현 CEO인 로이드 블랭크페인이다. 전 재무장관인 헨리 폴슨의 뒤를 이어 2006년 5월 골드만삭스 CEO에 취임한 블랭크페인은 원자재 트레이더에서 월가 최대 투자은행 최고경영자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트레이더 출신답게 취임 후 경영진에 은행 부문보다 투자 부문 출신을 중용했다. 최고경영진 4명 중 3명이 투자 부문 출신이다. 이들은 ‘로이드 사단’으로 불린다. 시장은 그의 취임 후 골드만삭스가 ‘머니 메이커’가 됐다고 평가한다.
금융개혁법 통과 위한 ‘승부수’ 해석도 그의 실책은 ‘실적 지상주의’를 외치다가 무리수를 둔 점으로 보인다. 그는 서른한 살의 월가 신동 패브리스 투레를 2007년 모기지 투자 부문 부사장으로 발령했다. 투레는 프랑스 국적으로 파리의 명문 고등대학인 그랑제콜(ECP)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와 2001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바로 골드만삭스에 입사한 수재다.
그는 골드만삭스에서 유럽 대형 은행들과 헤지 펀드를 대상으로 영업했고 2005년엔 주식시장 하락을 예측하는 등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모기지 투자 부문을 맡은 후 각종 파생상품을 개발해 실적을 냈다. 폴슨과의 거래도 그가 맡았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폴슨이 해당 투자 상품 설계에 관여했으며 그가 가격 하락 쪽에 베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아 투자자들에게 10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입혔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블랭크페인은 이 같은 SEC의 움직임에 강력 대응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4월 16일 SEC의 제소 사실이 공개된 직 후 성명을 내고 “SEC의 기소는 법률과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며, 회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법정에서 기소 내용을 반박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도 이날 직원들에게 보낸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에서 “우리는 한 번도 외부 압력에 굴복한 적이 없다”고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뉴욕타임스는 부동산 파생상품과 관련해 비슷한 성격의 거래가 수없이 많기 때문에 골드만삭스가 투자자들의 줄소송을 막기 위해서라도 SEC에 맞소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송 예상 투자자 중에는 골드만삭스 상품에 투자했다가 거액을 날린 은행을 소유한 독일 영국 정부도 포함돼 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최근 이번 거래가 “도덕적 파산”이라고 비난한 후 조사를 지시했다.
블랭크페인 개인적으로도 이번 소송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지난 1월 천문학적 보너스로 여론 재판의 집중적인 타깃이 됐었다. 이번에 사기 스캔들까지 사실로 확인되고 그의 연루 사실이 드러날 경우 ‘불명예 퇴진’을 면하기 힘들다.
골드만삭스와 블랭크페인의 이 같은 위기를 결정지은 사람은 SEC의 여성 위원장 메리 사피로다. 지난 4월 14일 SEC는 골드만삭스 고발에 앞서 5인위원회를 열었다. 혐의 사실을 기반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기 위해서다.
토의 과정이 격렬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내부 관계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민주·공화당 소속 위원들 간에 이견이 팽팽했다. 공화당 소속 위원 2명은 고발에 반대했고 민주당 소속 의원 2명은 찬성 쪽에 투표했다.
이때 무소속인 사피로 위원장이 고발 쪽에 한 표를 찍었다. 사피로는 지난해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했다. 사피로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두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첫째 백악관과 민주당이 금융개혁법안의 의회 통과를 성사시키기 위해 여론 몰이 차원에서 SEC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월가의 저승사자’로 불렸던 엘리엇 스피처 전 뉴욕 주 검찰총장은 “세상에 우연은 없다”며 “민주당이 상원에서 금융개혁을 밀어붙이려는 시점에 기소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마녀사냥’과 정당한 법 집행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이 계획한 시나리오대로 연출된 이벤트라는 것이다.
채플힐(미 노스캐롤라이나 주)=박수진 한국경제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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